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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Nov 04. 2021

풋사람

12살 지구인 이야기(29)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니 싱크대에 귤 과육이 서너 군데 작게 붙어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다른 곳에도 여럿 튀어 있었고, 부엌으로 작게 난 창틀에는 과즙이 티가 날 정도로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일이라며 답을 했다. 

하지만 자국들을 지우면서 살펴보니 아무리 봐도 이것은 흩어진 모양새로 봐서 귤이 터지면서 생긴 자국들이다. 귤이 일부러 터질 리도 없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평소 호기심 많은 아이가 어땠을지 눈에 그려졌다. 

우선 아이는 귤을 먹다가 빌헬름 텔의 사과처럼 어딘가에 세워놓고 장난감 활이나 총 혹은 그도 안되면 작은 공 같은 것으로 맞혀 보려고 했던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명중! 귤이 터진 것일 것이다. 

눈앞에 아이의 행동이 그려지고 귤이 터지는 순간 아이의 감탄과 놀람이 교차했을 장면이 상상되어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내게 혼이 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아는 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그마한 귤을 명중시킨 12살 명사수에게 내가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지 한 달쯤 지난 어제 아이와의 퇴근길. 아이의 얼굴이 신이 나 보여서 기분이 좋아 보인다며 인사말을 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는 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단번에 알 수도 있고, 심지어 귤을 부엌 창에 세워놓고 장난감 총으로 쏘아서 명중시켰는지도 알 수 있어."

"어! 엄마 그거 알고 있었어?" 아이가 깜짝 놀라 목소리가 커진다. 

"엄마가 모를 리 있겠니."

"어떻게 알았어?"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뒤통수에서 느껴진다. 

"엄마는 온통 너만 생각하기 때문에 다 알게 되더라."

"아. 알고 있었구나." 아이가 괜히 민망한지 웃는다.

"응. 그래도 다음에는 엄마한테 솔직히 말해줄래?"

"엄마가 화를 내봐야 얼마나 내겠니? 거짓말이 또 거짓말을 낳게 되더라고. 그냥 말하고 엄마의 무서운 얼굴을 잠깐 보는 게 좋을지도?"

"알았어. 다음에는 잘못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바로 말할게."


아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따끔한 가르침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아이의 안전이나 타인에 해가 되지 않는 인생의 소소한 경험에서는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가끔은 모르 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풋'이라는 접두사가 좋다. 참지 못해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같고 왠지 이 말을 붙이면 어떤 일이든 용서를 받는 마법의 말 같기 때문이다.


풋-「접사」       「1」 ‘처음 나온’, 또는 ‘덜 익은’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처음 나온', '덜 익은'의 뜻이 있다. 아이는 이 접두사와 너무 잘 어울린다. 아이는 아직은 모든 게 낯설고 처음인 풋사람이다.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아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하기보다는 아이를 서툴고 미숙한 그래서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풋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떨까.

이런 풋사람이 세상을 항해하면서 조금씩 풋이라는 접두사를 떼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일일 것이다. 

아이가 마음껏 세상을 탐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나의 목소리를 잠깐 뒤로 밀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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