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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r 03. 2022

완전한 용서


삶을 살다 보면 몇 번 덜컹거림이 있을 때가 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음이 느껴지는 그런 사건이 말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가 행복을 그리는 삶의 모습들은 흔히 타인을 중심으로 구성되기에 타인으로 인한 불행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많은 잘못을 하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용서를 하며 살았지만 내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어려운 일들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꽤 오래전부터 용서에 대해서 한 번은 글을 쓰고 싶었다. 용서에 대한 글을 쓰고 나면 그때는 정말 그 일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서툰 기대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완전한 용서라는 것은 있을까? 용서는 왜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일까? 잘못한 사람보다 왜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이토록 힘들어야 할까?


용서에 대해 생각하다가 용서가 무엇일지 뜻을 헤아려 봤다.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줌'으로 나와있었다. 덮어준다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 다시 찾아보니 따져 드러내지 않고 그대로 두거나 숨기는 것이란다.


한참을 용서라는 낱말 본연의 뜻을 헤아리다가 문득 알았다. 나는 아직도 완전한 용서를 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지만 내내 내게 일어난 그 일들을 불쑥 꺼내어 되새겨보고, 이유를 찾으려 들고 잘잘못을 명쾌하게 나누다 결국에는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었다.


용서를 왜 해야 하나를 생각해보니 결국에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잘못을 하지 않은 나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며 마음의 평정을 깨는 일은 용서를 해야 하는 나를 되려 벌을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타인에 대한 이해, 나에 대한 이해가 왔을 때 그리고 내 삶의 한 조각으로서의 사건으로 조용히 묻고 지켜볼 때 어느새 용서는 이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말이다.


인간에는 다른 생명체와 달리 오래도록 기억하는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본인이 기억하는 주관적인 영역이라고 한다. 나는 내 과거의 용서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편집하려고 한다. 가위자르듯 싹둑은 안되지만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바로 잡고 그래도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음을,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과정 중 일어났던 한 부분이었음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깨달음을 넣어 이제는 그만 덮어주려고 한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긴 시간 최선을 다해 용서하고자 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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