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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r 05. 2022

 밤을 걷는 시간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볕이 좋은 날이면 걷기에 특화된 유전자가 내 몸에 있는지 나가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왠지 나가서 햇볕을 맞으면서 걸어주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밤에 걷는 게 더 좋아졌다. 시작은 참으로 웃픈 이유다. 나이가 드니 얼굴에 기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외선 차단제를 듬뿍 바르고 걸어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좋은 풍경을 보다가도 볕이 얼굴로 강하게 내리쬐는 느낌이 들면 고개를 돌리게 된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자외선 차단제도 꼼꼼히 바르고 걸어보지만 뭔지 모를 답답함이 있다.


그렇게 시작된 밤 걷기는 나에게 여러 가지 매력을 보여 주었다. 우선 자외선 따위는 신경이 안 쓰여 어디든 보고 싶은 풍경을 천천히 마음껏 즐길 수가 있다. 위로도 옆으로도 한참을 봐도 된다. 하지만 밤에 걸을 때는 그런 걱정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모자도 벗어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흩날리는 것도 느끼고 행인이 없을 때는 가끔 마스크도 내려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밤에는 낮에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오늘은 걷는데 작은 정자 아래에 길 고양이들이 예닐곱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온 가족들처럼 한편을 각자 차지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뭔지 모를 시크함과 여유에  내가 가진 세상의 걱정들이 조금은 단순해진다.

집 근처에서 조금만 나가면 바다로 연결되다 보니 자주 걷는 길이다. 그런데 느낌이 다르다. 하늘과 바다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다르고, 조금씩 변해가는 공간이 다르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경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변화가 더해져 자주 걷는 길이지만 종종 새롭다. 나는 해돋이보다 해넘이를 좋아한다. 낮과 밤의 경계 시간에 땅거미가 지고 밤으로 변하는 그 순간을 참으로 좋아한다. 마냥 좋다. 나에게는 말 그대로 해넘이 멍이 최고의 휴식시간이다.

오늘도 해가 지는 풍경을 한없이 보게 된다. 그렇게 자주 본 공간의 하늘이지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본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경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이런 거 본 적 있어?"

아직도 해넘이를 보고 감탄을 내지를 수 있는 나를 보니 아직 뭔가에 두근거릴 수 있는 심장이 있는 한 생명체임을 느낀다.

밤 걷기의 또 좋은 점은 지나가는 행인들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에 보이는 어리숙한 실루엣과 해가 온전히 지는 시간에는 적당 서로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편안함이 있다. 무엇보다 인적이 드문 밤길을 따라 걸을 땐 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길을 내주지 않아도 되어 느리게 걸어도 된다. 몇 안 되는 그들은 그들의 속도대로, 나는 나의 속도대로 말이다.


그리고 밤에는 세상의 소리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 쏴아 파도 소리, 새들의 지저귐, 간혹 들리는 풀벌레 소리 등 낮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살아있음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밤을 걷고 돌아오는 마지막 길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르다.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는 좁은 마을길을 걷노라면 풍경을 즐기던 호기로움은 사라지고 지극한 외로움과 무서움이 갑자기 밀려들기도 한다.


결국 나 같은 겁쟁이는 이런 풍경도 함께 찬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더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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