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화가 난 게 아니야
13살 지구인 이야기(59)
퇴근 후 만난 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얼굴빛이 어둡고 얼굴 주변으로 '나 건들지 마' 레이저가 한껏 뿜어져 나온다. 이럴 때는 일단 알은체 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되 세세하게 묻지는 말아야 한다.
"화났어?"
"엄마는 몰라도 돼." 역시 예상한 답이 나왔다. 아이가 무엇인가 단단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신호다. 불편한 공기에 나까지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춘기 2년 차 아이를 둔 엄마인 나는 잘 안다. 하지만 안다고 다 할 수 없는 게 또 사람 아닌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궁금해진 참을성 없는 엄마는 아이에게 또 묻고야 만다.
"지금도 화났어?"
"엄마, 난 화난 게 아닌고 지금 속상한 거야." 여전히 아이는 퉁퉁이다.
'속상하다' 단어 뜻을 헤아려보면 어떤 대상에 대한 화보다는 불편하거나 우울한 감정이다. 무엇이 아이를 속상하게 했을까? 나름 선생님인 엄마는 또 다양한 데이터 베이스를 활용하여 아이가 화날만한 일들을 혼자 상상해 나갔다. 친구? 학교? 학원? 그도 저도 아니면 엄마인 나 때문인가?
"혹시...?"
"네가 좋아하는 아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거야?"
"무슨 소리야!" 아이의 작은 눈이 커지며 갑자기 목소리가 커진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누구랑 싸웠어?"
"아니." 두번 물어봤으니 마지막 이제는 마지막으로 물어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럼 학원에서 속상했어?" 이 질문에는 아이가 대답이 없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아이가 드디어 말을 했다. 자기가 학원에서 잘하는 편인데 오늘 본 테스트에서 결과가 너무 안 좋아서 재시험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너무 속상해서 학원 아래 분식집에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 맵게 떡볶이를 해달라고 해서 한그릇 사먹어 보았지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고 했다.
'화가나거나 우울하면 떡볶이를 먹는 나를 보고 흉내내긴!' 아이는 심각한데 나는 피식 웃음이 나고야 말았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시험 좀 못 본다고 속상해하지 않아도 돼." 세상 쿨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되려 핀잔을 받았다.
"엄마는 몰라. 그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학원에서 중학교 영어, 수학을 선행하기 시작한 아이가 부쩍 공부가 힘들다고 짜증 내는 경우가 많은 요즘이다. 공부하다가 어렵거나 안되면 나 같은 경우는 '음... 이건 모르겠군' 하고 맘 편히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아이는 나와는 달리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이해가 잘 안 되거나 열심히 했는데 틀리거나 하면 너무나 속상해한다.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나와 너무 다른 성향이다 보니 사실 아이가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럼 엄마가 도와줄까?"
"틀린 문제 다시 풀어보자. 난 그말이 제일 짜증나."
봤던 문제를 다시 또 풀고 풀고 하는게 자기는 기분이 나쁘단다. 감정을 오롯이 담은 아이의 말에 괜히 나까지 기분이 나빠져 버렸다. 엄마 모드로 계속 그랬냐고 들어주면 됐을 것을 그건 공부가 아니지 않느냐, 맞고 틀리는 것보다 틀린 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된다는 너무나 선생님 스러운 말들이 나와버렸다.
아이는 그뒤로 입을 처음보다 더 굳게 닫고 머리에 먹구름 하나 올린 채로 발까지 쾅쾅 구르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어렵다. 역시 부모는 나이가 어리든 많든 아이를 키우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매순간이 과제인 것 같다.
글을 쓰며 생각을 해보니, 아이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지나친 내 바람인가 싶다. 내가 보기에는 별일 아닌 일이 아이에겐 큰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음에는 어쩔 수 없다. 그저 그랬느냐고 아이가 화가났다고 하면 화가 난 대로 속상하면 속상한대로 그랬느냐고 그저 안아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