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인간실격』은 내가 읽기 전부터 강렬한 이미지를 지닌 작품이었다.
제목만으로도 나는 이 책을 자기혐오와 비현실적 자기파괴의 이야기로 상상했다.
다자이 오사무, 아니 쓰시마 슈지라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이미 자살, 방탕, 자학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소설은 내게 하나의 고백록, 혹은 남겨진 유서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며 나는 곧 예상을 배반당했다.
주인공 요조는 흔히 미남이라 불렸고, 사람들과 원만히 어울렸으며, 부유한 가문에서 큰 고난 없이 자란 인물이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매끈하고 무탈한 청춘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서서히 번지는 내면의 균열음이 있었다.
한 인간이 타인의 기대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윤곽을 지워나가는지,
그리고 그 빈자리가 어떻게 서서히 무너지고 텅 비어가는지를 나는 요조를 통해 목격했다.
요조는 본디 내적으로 무너진 자였다.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 다정함 속에서 그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감각했고, 너무도 예리하게 통찰했다.
타인의 위선과 가식은 그의 눈앞에서 투명해졌으며, 결국 그 위선을 흉내 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깊은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인간실격』은 단순한 연약함의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세상을 맨살로, 아무런 보호막 없이 감각해버린 인간이 겪는 비극의 보고서다.
나는 그 속에서 인간 다자이 오사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 계급의 피를 타고나고도 마르크스적 이상에 심취했던 그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과 사상적 신념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균열을 느꼈을지를 상상했다.
그의 세계에는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예민함은 남보다 특별하다는 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는 이 세계, 이 인간이라는 이름의 무리에 결코 섞일 수 없는 존재다’라는, 뼈까지 파고드는 절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일탈했고, 더 사랑을 구걸했고, 더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그를 구원으로 이끌지 않았다.
그 모든 순간은 오히려 그에게 다시금 속삭였다.
“너는 이 모든 곳에 속하지 못하는 자, 인간실격이다.”
요조는 늘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방어의 웃음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지나치게 능했던 그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웃었고, 타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웃었다.
웃음은 그의 갑옷이자, 동시에 그의 족쇄였다.
그렇게 그는 점점 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 무너짐의 틈을 메우기 위해 그는 일탈을 반복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에 매달리고, 순간의 쾌락을 좇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에게 위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들에서조차 그는 자신을 증오했다.
사람에게 안기면서도 그는 ‘나는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다’는 고립감을 더욱 깊게 느꼈다.
타인과의 접촉은 있었으나, 이해는 없었다.
그가 목말라 했던 것은 육체의 온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였다.
나는 그를 보며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렸다.
요조는 허구적 인물이지만, 동시에 다자이 자신의 분신이었다.
귀족적 혈통과 혁명적 신념의 충돌, 방탕과 자책의 무한 반복, 수많은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증폭되는 고독.
요조는 다자이가 자기 자신에게 쓴 고백서이자, 인간이라는 껍질을 벗겨낸 나체의 초상이었다.
그는 인간됨의 조건을 묻는다.
인간은 타인과 어울릴 때 인간인가, 아니면 타인에게 이해받을 때 비로소 인간인가?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단순히 문학작품으로 읽을 수 없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한 사람의 고백, 그의 고독, 그의 절망, 그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나는 한 독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주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남들에게 잘 어울리기 위해 가면을 썼다.
그 가면은 그 자신의 내면에서는 참을 수 없는 가식과 위선으로 다가왔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기라도 하는 순간, 그는 너무도 크게 무너지는, 너무도 외로운 인간이었다.
그의 외로움은 단순한 고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는 인간이라는 종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 존재다’라는, 끝끝내 스스로를 부정해버리는 고립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남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마음을 내어주었던 이들에게 버림받으면서도,
그는 “너 때문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유별나서, 내가 저들과 어울릴 수 없어서”라며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 자기파괴는 오만이 아니라, 극단적인 고독과 인정욕이 부른 슬픔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백에서 연민만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충동성이 있었고, 약간의 나르시시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사랑했고, 스스로의 불행에서 한 편의 비극을 만들어내며, 그 안에 안주하려는 모습도 분명히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타인에게 준 상처를 단편적으로는 이해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렴해버리는 태도가 있었다.
동반자살을 시도했을 때, 여자만 죽었고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잠깐의 죄책감을 언급했지만, 결국 더 많은 이야기는 자신의 고독과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서 깊은 불편함을 느꼈다.
나 같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 여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무너져 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위선과 가식을 인정하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다”라고 생각하고,
남들에게, 혹은 자신보다 어쩌면 더 성숙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데, 이해해줄 수 있겠니?” 그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혼자서만 망상하고 파괴할 게 아니라.
그리고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말해줬다면,
“그건 비인간적인 게 아니야. 그건 오히려 조금 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인 거야.”
그랬다면, 그는 자살 같은 극단으로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입체적이고, 선과 악은 주관적이며,
그 모든 복잡함과 모순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널리 이롭게 살아가려는 그 삶,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증명하는 삶 아닐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임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