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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욱 Jun 17. 2022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라.

세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김점과 허조가 벌인 논쟁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주고받는 설전의 내용이 꽤 흥미롭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술상을 마련하여, 여섯 순배를 나누고 파하였다. 참찬 김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시는 정사는 마땅히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법도를 따라야 될 줄로 아옵니다.”하니, 예조 판서 허조는 아뢰기를,

“중국의 법은 본받을 것도 있고 본받지 못할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김점은 아뢰기를,

“신은 황제가 친히 죄수를 끌어 내어 자상히 심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하께서도 본받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하니, 허조는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관을 두어 직무를 분담시키므로서 각기 맡은 바가 있사온데, 만약 임금이 친히 죄수를 결제하고 대소를 가리지 않는다면, 관을 두어서 무엇하오리까.”하였다. 김점은 아뢰기를,

“온갖 정사를 전하께서 친히 통찰하시는 것이 당연하옵고 신하에게 맡기시는 것은 부당하옵니다.”하니, 허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진이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하며,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선택하여 육조의 장을 삼으신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토록 하실 것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하여 신하의 할 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였다. 김점은,

“신은 뵈오니, 황제는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수 없이 놀라와, 6부의 장관이 정사를 아뢰다 착오가 생기면, 즉시 금의(錦衣)의 위관(衛官)을 시켜 모자를 벗기고 끌어 내립니다.”고 하니, 허조는,

“대신을 우대하고 작은 허물을 포용하는 것은 임금의 넓으신 도량이거늘, 이제 말 한 마디의 착오 때문에 대신을 주륙(誅戮)하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는다면, 너무도 부당한 줄 아옵니다.”고 하였다. 

(중략)

김점은 발언할 적마다 지리하고 번거로우며, 노기만 얼굴에 나타나고, 허조는 서서히 반박하되, 낯빛이 화평하고 말이 간략하니, 임금은 허조를 옳게 여기고 김점을 그르게 여겼다.

 - 세종실록 1년, 1월 11일자


김점은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직접 죄수를 끌어내어 심문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심지어 장관이 보고를 잘못하면 황제가 즉시 모자를 벗기고 끌어내렸는데, 그 위엄과 용단이 측량할 수 없이 놀라웠다고 찬탄한다. 그러면서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통찰하는 것이 당연하고 신하에게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며 세종에게 명나라 황제를 본받을 것을 권한다.


이에 반해 허조는 관청을 두어서 각자 맡도록 한 직무가 있는데, 임금이 직접 그 일을 다하면 관청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한다. 또 어진 인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런 인재를 얻어서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을 맡긴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마땅하고, 자잘한 일에 관여하며 신하가 할 일까지 하려고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논쟁을 지켜본 세종이 허조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이 기사는 마무리된다.


약 600년 전 있었던 이 논쟁을 보고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리더 역할에 대한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다. 김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이크로 매니징'의 필요성이다. 황제가 일개 죄수의 심문까지 직접 처리한 것처럼, 리더는 세세한 것까지 모든 일을 직접 챙겨야 한다는 것. 물론 마이크로 매니징이 정말 필요한 경우도 있다. 업무 경험이 전무한 신입사원이라면,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가이드를 주면서 일을 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은 넘어선 보통의 팀원들에게도 과연 마이크로 매니징이 옳은 방법일까. 


이에 대해 허조의 답변은 이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애초에 맡기지 말라는 것." 인재를 뽑아서 일을 맡겼으면 그를 신뢰해야 한다고, 그에게 책임을 지워 스스로 일을 성취해 내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이 있어서 간섭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제대로 위임하고,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라는 뜻이다.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리더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조언이다.


조직이 크지 않으면 리더가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팀원이 5명만 넘어가도 세세한 관리는 무척 어려워진다. 아무리 세밀히 챙기고 싶어도, 그 모든 상황을 다 챙기는 것이 불가능한 시점이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 결국 위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때는 믿고 맡길만한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았다면 과감히 맡기고 일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성장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 리더도 살고, 팀원도 살고, 조직도 산다.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도입하여 신하들에게 최대한 많은 권한을 주고 제대로 일을 맡겼던 임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김종서와 최윤덕은 북방영토를 개척했고, 박연은 궁중음악을 완성했으며, 장영실은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었다. 또 세종은 세세한 일들은 신하들에게 맡기고서 그 자신은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세종이 마이크로 매니징 하며 모든 일에 간섭하려 드는 리더였다면, 과연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난 아니라고 단언한다.


세종이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맡겼으면 의심을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라"며 리더의 위임과 책임에 대해 설파했던 허조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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