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수많은 신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폭군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 하지만 그가 폭군이 된 것을 오로지 어머니 폐비윤씨의 죽음이라는 가정사의 비극에서 비롯된 폭주때문이라 보기만은 어렵다. 전제왕권을 추구했던 연산군과 유교적 이상정치를 추구했던 신하들과의 충돌, 그리고 누적된 갈등이 촉매제가 되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연산군과 신하들은 늘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고, 타협이란 없었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너무 쎈 말이 오고 갈때가 많았고,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주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거나 대화가 단절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일은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한 직후부터 발생했다. 성종의 장례식을 위해 연산군은 불교식 천도제인 수륙제를 거행하고자 했지만 신하들은 조선이 유교국가인데 이단의 예식을 거행할 수 없다는 점과 성종 또한 불교를 배척했다는 점을 들어 수륙제는 오히려 불효라는 논리를 댔다. 하지만 연산군도 기존 왕실의 관례였던 수륙제가 한번도 시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성종이 수륙제를 하지말라는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는 한 성균관 유생이 수륙제를 반대하며 올린 상소에서 불거졌다.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가 불교에 빠졌기때문에 고작 10년밖에 왕위에 있지 못했고 신하가 반역을 일으켜(이시애의 난) 고생했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세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보일 수 있는 이 말에 연산군은 분노했고 그 유생을 국문하라 명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그의 감정을 건드리고 논쟁을 악화시킨 것이다.
번번히 연산군 편을 드는 노사신에 대해 반감을 가진 조순이란 신하가 그를 탄핵한 일도 마찬가지다. "춘추(春秋)의 법을 말하면 사신의 죄는 비록 극형(極刑)에 처해도 도리어 부족하옵니다. 신 등은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습니다."라며 극언을 한것이다. 자신앞에서 다른 신하에 대해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그가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한 것은 자신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라 단정짓고 국문하라 명한다. 조순의 주장이 온전히 연산군에게 전달되기는 커녕 긁어부스럼만 만든 것이다.
연산군과 신하들의 의견 대립이 선을 넘은 말한마디 때문에 서로 격화되는 양상을 보인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연산군 또한 자신의 지시에 사사사건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선넘은 실언을 했다가 스스로 체통을 잃고 강력한 반발에 휩싸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최말동이라는 상인이 잘못을 하여 감옥에 갇혔는데 연산군이 특별한 이유없이 그를 풀어주라 명했다. 법에 따라 국문을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이렇게 답한다.
"만약 임금이 있다고 여기면 내 말을 따를 것이요, 만약에 임금이 없다고 여기면 네 생각대로 하라. 군상(君上)이 말한 바를 만약 청종(聽從)하지 않는다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이적(夷狄)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자신의 말을 안들으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오랑캐라며 비아냥거린 것이다. 수치를 느낀 신하들이 관직을 때려치겠다며 반발한다.
연산군은 첫 아들을 낳자 기쁜 마음에 모든 신하들의 관직을 올려주라 명한다. 대기업 회장님이 첫 아들이 태어나자 너무 기뻐서 모든 직원들 직위를 올려준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무는 전무로, 부장은 상무로, 차장은 부장으로... 직장생활 해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지시인지 잘 알것이다. 당연히 신하들이 반대하자, 연산군은 나라의 원자가 차라리 없는게 낫다고 여겨서 그런 것이냐며 더 황당한 말을 한다.
또 한 내시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죄를 추궁하지 않으면 나라의 권세가 내시에게 있다고 볼까 두렵다는 대간의 주장에, 연산군은 되려 "내가 보기엔 나라의 권세가 내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간에게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해서 신하들이 모욕감을 느끼며 사직하겠다고 한 일도 있었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 주장을 더 강하게 내세우려다보니 안해도 될 말을 끌어들여와 서로의 감정만 격화된다. 그러다 원래의 이슈는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리고 서로에 대한 악감정만 남아 버리는 이 악순환의 과정, 그것이 연산군 초기 치세때의 모습이었다. 나중에는 그런 과정조차 사라지며 사화를 거쳐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종국에는 연산군 스스로도 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나며 배드엔딩으로 끝나고 말았던 역사를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이 역사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직장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회사에서 모든 일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거친다. 말이 정말 중요한 이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른바 팩폭을 하거나 말로 때리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의 감정선을 건드리며 불필요한 오해나 반발을 부르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연산군과 그 신하들이 날선 대화를 하며 그랬듯, 고인능욕을 한다느니, 쓸데없이 살덩이를 씹고 싶다느니, 오랑캐나 다를 바 없다느니, 차라리 원자가 없는게 낫다고 여기는 것이냐느니, 나라의 권세가 대간에게 있다느니...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되면서 감정만 건드리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 선택한 단어 하나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드는 일은, 곱씹어 보면 안타깝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도 종종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을 늘 기억하자. 이 말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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