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길..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저, 지쳤어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네요.
돌아와 홀로 기댄 방, 선연한 별무리가 반짝입니다. 밤하늘이 언제부터 저렇게 아름다웠는지요. 아니, 매일 이렇게 아름다웠을 텐데. 잊고 지냈었네요.
반짝이는 별빛은, 한 떨기 눈물에 반사되어 더더욱 영롱합니다. 아아, 이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탄식하다 문득 당신이 떠올랐어요.
부끄러움은 존재를 잊은 자의 몫입니다. 처연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나는 나의 작은 숲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제 마음속에는요, 작은 숲이 있어요.
그 숲은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아주 소중한 공간입니다. 그곳엔 저의 온갖 감정과 기억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내가 어린아이일 때는 숲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푸르른 공간이었어요. 많은 사랑과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새들이 와서 지저귀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파가 들이치고, 파괴된 세상에 내던져지면서 나의 숲은 점점 오염되고,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처음으로 나의 숲에 오신 날을 회상해봅니다.
세상살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만신창이 된 그 무렵. 칼날 바람 부는 광야 한 가운데 덩그러니 홀로 선 듯, 서러웠던 그때. 압도적인 공허에 짓눌려 작은 외침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대로 있었다면 필시 찢겨 죽었을 나에게, 당신께서는 찾아왔어요. 천천히 다가와서, 조심스레 어루만졌죠.
그저 신음밖에 하지 못하는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피투성이의 멍과 상처를 닦아주었습니다.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사랑으로 일으켜 세우고, 함께 거닐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다만 내 마음속 작은 숲에 들어와 쉬어가기 원하셨습니다. 교제하기 원하셨습니다. 나는 기꺼이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그곳은 마치 처음부터 당신의 자리였던 듯, 당신이 들어오시자 빛났습니다. 오염은 정화되고, 찬란한 생명이 자라났습니다.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기쁨을, 처음 알았어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기쁠 때 같이 기뻐하고, 차마 말 못할 슬픔도 다 듣고 함께 우는 친구.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 그 하나만으로도 다른 건 필요 없었습니다. 나는 매순간 당신과 친밀하게 교제했지요. 우린 서로 사랑했어요.
당신은 나를 바라봐주었습니다.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내 모습 그대로를 보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맑고 깊은 눈동자. 그 속에 비친 형상은, 더할 나위 없는 '걸작품'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면,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마음이 식기 시작했습니다.
자그마한 나의 숲속에, 다시 많은 것들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저것 다 맛보고 누리며 살고 싶었기에, 점차 당신을 밀어냈습니다. 그 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웠습니다. 가시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은 울창해지고, 가시는 점점 날카로워졌습니다. 조금씩 밀려나던 당신께서는, 급기야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이의 교제는 뚝 끊겼습니다. 머잖아, 당신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나를 제멋대로 방치했습니다. 어느덧 거대한 가시나무 숲이 된지도 모른 채.
마음 아파하며 우두커니 서 있던 슬픈 눈을, 몇 번 마주친 것 같아요. 음습한 구석에 떠밀려 서 있던..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왜 거기 있고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요. 저는 제가 제대로 살고 있는 줄 알았거든요. 여전히 자리를 내어드린 줄 알았거든요. 같이 손 잡고 걸어가는 줄 알았거든요. 이게 진정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기를 몇 년 혹은 몇 십년. 나는 서서히 어그러지고 망가져, 탈진한 채 죽은 숲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 내어드렸던 자리를 더듬어 봅니다.
거긴 처음부터 당신을 위한 자리였는데.. 당신이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웠던 나를 봅니다. 허랑방탕한 삶 속에서, 바람 불면 바스라질 허탄한 것들에 의지해 살아온 나를 봅니다. 그렇게만 살았네요. 당신께서 들어올 곳, 쉬어갈 곳 하나 없이.
돌아와 누운 방. 조각난 마음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문득 당신의 자취를 느낍니다. 가시나무 숲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날 기다리는 당신을 느낍니다.
늘 꾸짖거나 화내지 않고, 다만 곁에서 믿으며 기다려주신- 그 사랑을 기억합니다. 영혼이 먼저 알고 그리워합니다. 다시 한 번 당신의 사랑을 힘입어 살고 싶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께서 들어오지 못했던 그 자리. 이제야 당신께 돌려 드립니다.
이제야 다시, 당신을 초청합니다. 너무 늦지 않았기를.
어서 오세요, 부디 어서, 오세요.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나의 숲이 우리의 숲이 되고, 가시나무 숲이 아닌 상록수 숲이 되고 싶습니다.
지치고 다친 파랑새들이, 우리 곁에 머물러 쉬어가도록..
이 글은 하덕규(시인과 촌장)님의 곡 <가시나무>(링크)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 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http://pixabay.com(이하 작가명)
표지 및 마지막: "Pexels"
1번: "JuiMagicman"
2번: "diego_torres"
3번: "JordanStimpson"
4번: "domeckop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