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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Sep 29. 2015

괜찮아, 실패해도.

그 한 마디가 주었던 용기에 대하여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발표는 언제나 떨린다. 특히 이번엔 첫 소논문이라 더더욱.

나는 교탁 위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단추를 끄르고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교수님의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수고했어."

 이윽고 긴장이 풀렸다. 지난 일주일 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배시시 미소 지었다. 조목조목 지적이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해낸 거다.



'실패'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몇 년 전 보았던 '실을 감는 패'? 좋은 발상이지만 아쉽게도, 실패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을 연상시킨다. 좌절, 낙담, 망신 등의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재수, 실직 등의 큰 차원까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때, 보통은 성공하고 싶어 하지 실패를 꿈꾸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말 많이 실패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일 만큼. 노력이 부족해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요령이 없어서 실패한다. 또는 소위 재수가 없어서,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서, 날씨, 장애, 행운 등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따라주지 않아서 실패한다. 크고 작은 실패는 공기처럼 늘 우리 주변에 머무른다.


 "하고 나니 뿌듯하긴 하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금에서야 털어놓는 거지만, 나는 첫 수강신청 때 이 과목을 넣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론 하나였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졸업논문 발표회 때마다 부드럽게, 하지만 예리하게,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시던 교수님이었고, 늘 선배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공통적으론 매우 침울해했다. 나도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 수업을 뺐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역사 과목이지 않은가. 수업시간이 결코 녹록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교수님 수업을 들었던 선배가 내게 조언을 해줬다. 해보라고. 그냥 해보라고 했다. 깨질 땐 깨져보라고 했다. 성장통 없이 어떻게 성장하려 하느냐고. 물론 고생할 게 뻔히 보이지만, 그만큼 성장할 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여전히 떨떠름했다. 안 그래도 학점 때문에 더 고민 많은 이번 학기인데. 갈팡질팡하다가 일단 첫 시간(O.T)에 들어갔다.

 강의실은 휑했다. 나 포함 7명이 전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겠지만, 아마도 나처럼 생각했나 보다. 나처럼 깨지기 싫고 고생하기 싫고. 저번 학기에 이 수업을 들은 동기와 선배들의 제보로 정보가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흠.. 과연 이 수업은 빼야 하는 건가?'하고 고민했다.

 교수님이 오시고 O.T가 시작되었다. 이 수업을 하며 가져야 할 역사적 관점에 대해 먼저 설명하셨다. 이어지는 (두꺼운)참고도서 목록. 그리고 모두를 기피하게 만든 발표수업에 대한 안내.

 "발표수업.. 해본 사람 있나?"

 일동 침묵.

 "지난 학기에 수강한  ㅇㅇ은 빼고. 없는 건가?"

 긴장된 분위기가 한 차례 지나갔다.

 "발표도 이제 슬슬 해볼 때가 됐어."

 맞다. 해볼 때가 됐지. 언젠가는 해야 하는 거고. 근데 참 두렵다.


 내가 짧게나마 살아오며 경험한 우리 사회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 '패자부활전'이 힘들다. 어려서부터 1등 하라고 배운다. 경쟁에서 이기라고 배우고,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목표달성에 실패하면, 호된 꾸중이나 실망한 얼굴 등을 마주하게 된다(물론 모든 부모님들이 이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정서라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들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점차 실패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자본주의의 특성인 무한경쟁과 맞물려 실패는 더더욱 용인할 수 없게 된다. 재도전을 고깝게 본다.


 "다들 긴장했네. 너무 쫄지 마. 마음껏 실패해봐. 너네 아직 학부생이잖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껏 실패하라고?

 "이런 거 처음 해보잖아. 하나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줄게. 물론 깨질 땐 깨지고 지적받을 것도 감수해야지. 하지만 처음이니까 당연한 거야. 학점도 노력하는 성의가 느껴지면 잘 줄게. 점차 좋아지는 거지. 마음껏 실패해봐."



 몇 년 전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그 뒤로 위로를 테마로 한 책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청춘'에 이어 '여자', '마흔'.. 언론매체는 '아프니까 신드롬'에 대해 앞다투어 분석을 내놓았다. 요점은 그랬다. '우리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얼마 전 일. '종이접기 아저씨'로 유명한 김영만 씨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그는 방송 중 "어린이 여러분, 참 잘 자라 주었어요."라고 말했고, 이 한 마디가 2-30대 청년들을 울렸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말. "걱정 마. 할 수 있어."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 우리들 심경을 잘 나타낸다.

성인이 된 후에 잘 자라줬다 라고 말해준 어른은 김영만 아저씨 뿐인듯. 나 한사람에게 하는 말은 아니지만 늘 잘못하고 있는건 아닌가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고 자책하던 내게 성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하기보다는 잘 자랐다라는 그저 있는 그대로 ‘칭찬’을 해준 사람은 김영만 아저씨가 유일…(중략)

나도 깊이 공감했다.

넘어졌을 때, 잘 안 풀릴 때, 속상할 때, "왜 그랬어! 왜 그래?" 가 아니라 "괜찮아?"

"좀 더 잘하지 그랬어! 그렇게 밖에 못해?"가 아니라 "아쉽다. 너도 마음 아프겠네.."

"제대로 하지.. 네가 잘못했네."가 아니라 "속상하겠다. 실수했구나."

"잘해야만 해!"가 아니라 "괜찮아,  실패해도."라는 말.

 그런 말이,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겐 필요하다. 실패에서 배울 수 있기 위해서.


"실패해도 괜찮아. " 이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마음껏 실패해보라는 그 한 마디에 힘입어서, 힘 닿는 대로 발표를 준비했다. 확실히 처음이라 너무 힘들었다. 도망가고 싶고 다 던져버리고 싶고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했고, 끝내 해냈다. 이어진 피드백도 홀가분하게 들었다. 다음 발표 때 반영해서 나아져야지.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한 마디 덕에 일어난 기적이다.


 첫 단추를 끼우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왜 꼭 처음부터 잘해야 하는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데. 처음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실패해보면 안 되나? 왜 죽을 것 같이 몰아세우는가. 왜 죽일 것 같이 달려드는가. 전문가도 태어날 때부터 전문가가 아닌데.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가 필요한데. 서투르고 서툴러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할 뿐인데.

 문득 생각났다. 미당 서정주의 언어가. 그는 <자화상>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자기고백을 한다.

"스물 세 해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나는 앞으로도 정말 많은 실패를 하게 되겠지. 물론 같은 실패를 지속적으로 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하지만 햇병아리일 때의 실패는 두려워하지 말자. 젊을 때 더 많이 실패해보자. 그리고 성장하자.

 성인(成人)으로, 성인(性人)으로, 성인(聖人)으로.



후속 글: "아픔, 상처가 열매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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