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밀 Feb 12. 2020

도서관에서 자라는 나의 20대


  나는 20대의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면서도(솔직히 학부 때는 많이 안 갔지만)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도, 최근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 이제 나의 20대와 도서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셈이다.


  사실 나는 도서관과의 연을 악연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 자체가 싫었다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준비만 하고 있는 내 신세가 싫었다. 무기력과 슬럼프에 빠졌던 때, 도서관에서 해야 할 공부는 못하고,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울고만 온 적도 있다.


  그래도 당분간 내가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 다시 가깝게 지내게 될 텐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지내보고 싶어졌다. 또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만큼 내 20대를 표현하는 데 도서관만 한 글감이 없다는 계산도 섰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키워 온 나의 20대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려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내가 바라본 도서관 이용자들의 유형과 유형별 특징을 정리해 보았다.


1 유형, 잠시 시간을 때우러 오는 사람

: 공강이 생겼는데 갈 곳 없는 대학생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통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엎드려서 자거나, 노래를 듣는다. 대학교 도서관이냐, 지역 도서관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은근히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2 유형, 과제나 밀린 일을 하러 오는 사람

: 대개 표정에 영혼이 없다. 가끔씩 표정이 살아 있을 때는 ‘스트레스가 격해져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종종 자리를 비운다.


3 유형, 고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 내가 해당됐던 유형이자 지금도 해당되는 유형이다. 가장 장시간 앉아 있으며, 독서대나 칫솔 세트 등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고시생 못지 않게 오랜 시간 앉아 있다 가는데, 특히 공기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취업난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4 유형, 순수하게 책을 빌리고, 읽으러 오는 사람

: 도서관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드물게 발견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러워했던 유형이었다. (부러워했던 이유는 아래에)



  실제로 ‘성인의 공공 도서관 이용 목적’에 관한 통계청 자료(2017)에 따르면, 18-29세의 경우 50.1%가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답했다. ‘책을 보거나 빌리기 위해’는 39.3%에 그쳐, 전 연령대에서 가장 낮은 비율을 차지했다. 즉, 20대의 경우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이 4 유형보다 3 유형에 해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보통 4 유형의 사람들의 경우 책을 빌려서 나가는 경우가 많으니, 실제로 도서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4 유형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한동안 화제였던 별마당 도서관. 이 글의 2, 3유형에게 좋은 구조다.


  이렇게 드물게 발견되는 유형이면서, 내가 가장 동경하는 유형이 4 유형이었다. 이상하게 평소 때는 그러지 않다가 공부를 할 때는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항상 시험 끝나면 목표가 책 읽기였다. 지식이 열거된 수험서가 아닌 스토리가 담긴 책을 읽고 싶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진 않았지만, 시험 전에는 수험서가 아닌 책을 읽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이상한 강박이 생겼다. 괜한 조급함에 심적인 여유를 잃었던 것 같다.


  그런 나와 달리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게임, 유튜브 등 재밌는 유혹이 넘치는 시대에 독서를 하러 도서관에 오는 것도 멋있었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꼭 책 읽으러 도서관에 가야지’ 라고 항상 다짐했고, 실제로 몇 번 시도도 했지만 그 다짐을 길게 끌고 가지는 못했다.

 

  또 좌절되긴 하겠지만 공부하러 말고 책 읽으러 도서관 가기를 종종 시도해 보려 한다. 3유형으로만 도서관에 가는 건 이제 지겹다. 도서관에서 다른 기억을 만들고 싶고, 무엇보다 더이상 하고 싶었던 일들을 미루면서 살고 싶지 않다.


  작년까지 고시를 준비하면서 하고 싶어도 참았던 일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그 일들을 참지 않고 하나씩 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브런치 연재도 그중 하나다. 남들이 봤을 땐 ‘취업 준비만으로도 빠듯한 시기에 너무 딴짓하고 사는 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말에 눈치 보고 싶지 않다. 전속력으로 달리다 픽 쓰러지는 일을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할 일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살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단거리 달리기보다 장거리 달리기를 훨씬 잘했다. 단거리 달리기는 거의 꼴찌를 도맡았지만, 오래 달리기만큼은 반에서 5등 안에 든 적도 있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지는 못할지라도,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일은 잘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때 어린 나의 마음으로 올해를 살아가려 한다. 조급해 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느리더라도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게 내게는 맞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긴 레이스를 함께 할 도서관과 좋은 연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년 끝에 설 나에게 보내는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