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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파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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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화 Apr 04. 2024

해미읍성에서

슬픈 너무나 슬픈 호야나무

해미읍성에 가 보았다

그곳에 천주교박해 때 호야나무에 철사로 목을 걸어 천주교인들을 죽게 했다는 그 호야(회화) 나무가  아직도 동헌 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철사자국이 이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해미읍성에 갔을 때는 역사적인 관점을 두지 않고 그저 여행지로서의 해미 읍성을 보러 갔었던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수문장이 지키는 진남문을 통해 들어가며 해미읍성을 생각해 본다

왜구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1417(태종 17년)~ 1421(세종 3년)에 축성하여 1652년(효종 3년)까지 230년간 충청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관청이었다

그 후로 충청도 5 진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을 두었으며 해미현을 병영으로 옮겨 현감과 영장을 겸하게 하는 겸영장제를 실시하여 1914년까지 호서좌영으로서의 지위를 지켰다고 한다

해미읍성에 입성하여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옛 무기들을 전시해 놓고

여행객을 부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회화나무가 보호줄 안에 있었고 그 앞에는 천주교 박해 때 이 회화나무에 철사로 목을 묶어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는 설명도 쓰여있었다

철사자국이 있다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에 철사줄 묶인 자국 여러 줄이 보였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아픔을 간직하며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먹먹함에 발길을 돌린다

동헌 앞에는 관아에서 죄를 치리 하는 모습이 있어 잠시 해미현감이 되어 판결을 내렸다

ㅡ죄인은 배가 고파 지은 죄이니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쌀 한가마를 주어 보내라 ㅡ 라며 판결을 내리는 나의  목소리에 주변에 서있던 여행객들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읍성은 관아와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 초가에는 초례청을 차려두고 기념사진을 찍도록 해 두어서 외국 여행객의 사진을 찍어주니 무척 기뻐하며 우리도 찍어 주었다  다양한 집들이 있어 둘러보고 동산 위로 올라가 그곳의 정자 청허정에 올라

봄날은 간다를 부르니 짝꿍은 동영상을ㅡㅎ

잠시 그곳을 즐긴 후 대나무 숲으로 내려와 입구 쪽으로 나오는데 많은 수의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와 있었다

ㅡ어서 와 해미읍성은 처음이지?ㅡ라는 환영 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다

저리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들어와 무료관광을 즐기고 있는데 찻집이며 기념품 가계가 평일이라서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여행객을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그들이 무언가 기념품을 구입하고 차라도 마실 수 있어야 그래도 실익이 있지 않을까?

해미읍성에 들어가서는 회화나무를 보며 안타까웠는데 나오면서는 외국 관광객들을 빈손으로 보내는 해미읍성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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