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과묵한 편입니다 여러해 같은 길을 오갔는데도 별 말이 없더군요 그저 말없이 걸었어요 등에 연필을 매고 다녔다면 하나의 선이 되었을 거예요 나는 그 선이 썩 마음에 들었어요 선의 단순함 선의 편안함 선의 안정감 반복되는 선들 나는 그걸 삶이라고 믿었어요 반복이 나를 살게 했어요
그 선을 따라갔어요 길을 따라가던 그날 힘들어서 돌 위에 앉았어요 돌은 시원했어요 마침 횡단보도 앞이라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구경을 했어요 그러다 처음 보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어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거기 모두 모여있었어요 갑자기 모든 게 어색했어요 고개를 들었더니 코 끝으로 건물들이 몰려와 있더군요 건물들이 유난히 높아 보였어요 도로는 계속 이어지기만 하고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그곳에서 떠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디로 걸어가도 자꾸 길을 잃어요
내가 그렸던 선들은 구불구불 모두 흩어져 버렸고 나는 백지를 다시 받았는데, 그게 꼭 눈 덮인 도로 같았어요 눈 내린 도로에는 방향이 없어요 뒤를 돌아봐도 눈 발자국은 하얗기만 하고요 눈을 던지고, 누워도 보고, 눈덩이를 굴리고 그 새벽에 뛰어 놀다가 돌 하나를 종이 위에다 얹어뒀어요
나는 이제 돌이 삶이라고 믿어요 돌이 나를 살게 했어요 여전히 새하얀 종이 한 가운데에 그 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