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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미잘 Jan 11. 2024

메멘토모리가 뭐가 나빠?

사랑과 관계의 메멘토모리는 헤어짐의 가능성을 되뇌는 것이 아닐까

"우린 언제든 헤어질 수 있어."

이 말이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말을 좋아한다.

아내에게도 몇 번이나 말했었다. 아내는 그때마다 끔찍해했지만 내 나름대로는 사랑에 대한 표현인 동시에 갈구였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 어린 시절 신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발이 큰 편이다. 어렸을 때는 발이 큰 게 콤플렉스였다. 내 발 사이즈는 285cm. 발 볼이 넓고 발 등이 높은 편이라 때때로 290 사이즈의 신발을 사야 할 때도 있다. 어른들은 발이 큰걸 보니 키도 클 거라고 말했었지만 인체의 신비는 일정하게 떨어지는 법이 없다.

아무튼 이 정도로 발이 크면 신발을 살 때 무척 불편하다. 더군다나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지역은 전북 김제라는 작은 도시였다. 김제 시장에는 신발가게가 몇 개 없었다. 그리고 그 신발가게에도 내 발 사이즈에 맞는 신발은 별로 없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그래도 큰 사이즈의 신발이 좀 있었을 텐데, 그 시절에 나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신발이 해져 신을 수 없게 되어서야 엄마와 시장으로 신발을 사러 갔었다.

신발 가게에 가면 벽면 가득히 신발이 쌓여있는 걸 볼 수 있다. 다양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감의 신발들. 나는 지금도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어렸을 때도 물론 그랬지만,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중요하고 뭐든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원하는 디자인의 신발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물론 내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어 했다. 문제는 신발들은 내 의사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신발을 좀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고르면 어김없이 가게 주인은 ' 그 신발은 270 사이즈까지 밖에 안 나와요.'하고 말한다. 다른 신발을 골라봐도 여전히 나에게 맞는 사이즈는 없었고, 보다 못한 가게 주인이 '이 신발이 좀 크게 나와요.'하고 신발을 추천해 줘도 야속하게 내 발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면 나와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질문해야 했다.

"285 사이즈의 신발이 있나요?"

그럼 가게 주인은 딱 한 켤레 있다며 신발을 가져다줬다. 그럼 내 신발 쇼핑은 그걸로 끝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그걸 신어야 했다. 다른 가게로 가 봤자 그 가게에도 285 사이즈의 신발은 딱 한 켤레뿐이었으며 대체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가게에 가 볼 필요도 없었다. 커다랗기만 한 새 신발을 손에 들고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사람을 사귀다 보면 관계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익숙한 관계가 계속되다 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만나고 있는 건지, 익숙해서 만나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상대가 그저 익숙해서, 헤어지지 못해서 나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우울해졌다. 나는 우리 관계가 관성의 결과가 아니라 매 순간 서로의 자유로운 선택이길 바랐다. 상대방에게 마지막 남은 신발 한 켤레를 신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사랑해."같은 말을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대신 "우린 언제든 헤어질 수 있어."같은 말을 좋아했다. 그건 "언제든 헤어질 수 있음에도 너와 함께 있는 건 내가 계속해서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야."의 줄임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런 말들은 갈등의 화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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