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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빼고, 산나물 빼고

by 이해건

얼마 전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호주 백인 한 명과 한국으로 출장 갈 일이 있었다. 일하는 분야도 서로 비슷하고 나이도 동갑이고 하여, 우리말로 해서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이다. 호주 내에서 함께 출장도 다니고 해서 이 친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은 아는 터였는데, 그래도 먼 나라 떠나는 길이 안심이 안 되는지 나에게 재삼 물었다.

“한국에도 채식주의자가 있느냐?”

“암, 있고말고. 고기 먹으면 두드러기 나는 사람도 보았고, 생선 비린내만 맡아도 구역질하는 친구도 있지. 우리 한국 사람은 예전에는 자의건 타의건 채식을 했다네. 육미나 생선값이 좀 비쌌어야지. 설 명절 추석 명절로나 고깃국 한 그릇 먹으면 그것도 형편이 괜찮은 집이었거든. 된장찌개에 소고기 냄새라도 나면, 식구 많은 집에 동작이라도 빨라야 하는데, 재빨리 하나 건져 씹은 것이 풀리다 만 된장 덩어리였던 경험도 있지. 그럼, 한국은 주식이 밥이고, 나물과 고기를 찬으로 먹지.”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 일 보러 지방에 내려갔는데, 거기 연구 사업을 같이 할 기관의 구내식당에서 음식 이야기는 시작된다.

거기 직원 두 사람과 저녁 식사하러 구내식당에 갔는데, 메뉴도 단출해서 생선찌개 백반, 소고기덮밥, 돌솥비빔밥 세 가지. 호텔에 있을 때야 종업원들이 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니 스스로 메뉴 정하는 데에 별문제가 없지만 여기는 구내식당이라 천생 내가 중간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네 먹을 것은 돌솥비빔밥이 좋겠네. 아가씨, 이 서양 아저씨 식성이 까다로워 그런데, 돌솥비빔밥에 소고기 빼고, 계란 빼고, 고추장 따로 해서 좀 주세요.”

“아저씨, 서양 사람들은 소고기 스테이크 잘 먹고 산다는데, 이분 어디서 왔어요?”

“그래, 호주에서 왔는데, 잘 못 먹으면 두드러기 나서 그러니 미안하지만, 주방장에게 잘 말씀드려서 부탁한 대로 좀 준비해 주세요.”


한참 후에야 자글자글하는 돌솥비빔밥이 네 그릇 나왔는데, 주문한 대로 하나는 고기 빼고 계란 빼고 고추장 따로 해서 나왔다.

“이건 한국 특유의 음식인데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야. 숟가락으로 잘 비벼서 먹으면 제대로 맛이 난다네. 뜨거우면 옆에 있는 물김치 국물을 떠먹게.”

그런데, 이 친구 비비지는 않고 그릇 속만 들여다보고 있다.

“뭘 보는가?”

“미안하지만, 무슨 나물들인지 일러주겠나?”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버섯, 산나물, 도라지,…”

“고사리, 산나물,…을 못 먹네. 안 먹기도 하고.”

“?”

차 떼고 포 떼고 무얼로 장기 두나? 결국 시금치와 콩나물로 고추장 없는 비빔밥을 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한 그릇 다 비우는 걸 보니 굶기지는 않았구나! 안도는 되었다.


숙소로 돌아와서 차를 한잔 나누는 기회에 물어보았다.

“자네 못 먹는 것이 무엇 무엇인가? 미리 아는 것이 좋겠구먼.”

머뭇거리다 하나씩 섬기는 것이,

“고기류, 생선류, 새우류, 조개류, 해초류, 야생나물류, 고추, 화학조미료, 인공감미류, 색소첨가물,….”

끝도 없이 나가는데,

“됐네. 먹는 것만 일러주게.”

“쌀, 시금치, 숙주나물, 아보카도, 파파야, 실버비트, 양상추, 당근,…”

아보카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우리나라에 아직 있지도 않고, 이 꽁꽁 추운 겨울에 양상추도 흔치 않을 테니, 자네는 천상 밥과 시금치, 콩나물 밖에는 없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내일부터 식생활 해결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런 것 먹으면 두드러기 나나?”

“아니, 내 선택이야.”

“무슨 곡절이라도 있는건가?”

“나도 예전 젊을 때는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잡식성이었다네. 청년 때는 스테이크도 두툼한 걸로 두 개는 거뜬히 해치웠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는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모든 생명체를 다 포함하는 “우리”가 말이야. 인간이 자신의 생명은 귀하게 여기면서, 단지 혓바닥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모순이야. 오만이지. 야생하는 식물도 마찬가지야. 틈바구니 비집고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고 있는데, 내 입맛 돋우려고 생명을 앗는 것은 아니지.”

“인간은 자연을 파괴할 권리가 없어. 누구도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든 후로부터 나는 할 수 있는 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살기로 했네. 생각해 보라고. 인간이 먹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이 자연을 손상하는가를. 나도 처음에는 어려웠네. 아편을 끊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지 몰라. 자, 내 몸을 보라고. 이렇게 튼튼하지 않은가. 테니스를 3시간씩 쳐도 끄떡없다네.”

자랑하는 팔뚝과 다리통을 쳐다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먹으면 죽는다면 몰라도 멀쩡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바꾸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었겠나. 먹는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만, 뜻을 두고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실천해 나가는 자네의 그 정신과 의지를 나는 존경하네. 강한 의지로 살아가는 자네 같은 사람이 있기에 호주라는 나라가 푸르고 청정하게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네. 호주 해변에 오뉴월에 해삼 퍼지듯이 늘어져 있는 저 사람들이 자네 같은 사람을 좀 닮는다면 세상이 더욱 좋아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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