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의 승선 생활을 마무리 하고 나는 진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원래는 승선을 마치면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선박금융이나 해상법을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당시 승선을 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영국으로 유학을 오는 목적이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목적이라고 하면, 육상에서 경력부터 쌓고 오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외국의 유명 해운 회사들은 승선 경력만 가지고는 취업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취업난으로 일자리도 많이 줄어들었을 뿐 더러 자국민들 우선으로 채용을 하기 때문에 국내 유명 해운회사에서 육상 경력을 쌓고 오지 않으면 현지 취업은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승선 생활을 마치고 영국에서 유학을 마친 친구들은 현지 취업에 실패하고, 국내로 돌아와 다시 구직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항사 경력에 영국 유학을 마치면 글로벌 해운 회사들이 나를 모셔갈 것이라는 내 환상과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
물론 해운의 중심지인 영국에서 유학을 하게 되면 글로벌 해운 인재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고, 해운에 대한 견문과 깊이 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겠지만 영국 유학에 드는 기회비용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국 유학에는 1억이 넘는 비용이 드는데 그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남들과 똑같이 취업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선배들과 동기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육상 해운회사에서 경력을 먼저 쌓고 유학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 내가 가장 취업하고 싶은 회사는 내가 승선을 한 해운회사의 해외 영업팀이었다.
해운회사의 영업팀은 쉽게 말해 선박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을 한다. 선박이 운송할 화물의 주인인 화주와 운송 계약을 채결하고, 선박의 운항 계획을 수립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배를 탈 때 선장님과 영업팀 당당자와 통화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선장님 이번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선적하여 중국에 양하하는 화물로 계약을 채결하였습니다. 중동 보다는 서아프리카 시황이 좋아서 아프리카향 화물로 계약을 채결 했으니 항해 준비 해주세요.”
어렸을 때 재미있게 했던 ‘대항해 시대’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배를 가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서 돈을 버는 게임이었다.
나는 해운회사 영업팀에서 하는 일이 마치 대항해시대 게임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업팀에서 화물을 채결하여 선박에 지시를 주면, 선박에서는 그 지시에 맞춰 항해를 한다.
항해사로서 6년간 선박을 직접 운항 하는 일을 했으니, 이제는 그 선박을 통해 돈을 벌어보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인사팀에 사직서를 내고 나서 내가 승선하였던 해운회사의 영업팀 사무소를 찾아갔다.
당시 영업팀 담당자는 지금은 해운 시황이 좋지 않아서 채용 계획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배를 그만 둔 시점인 2017년은 해운 시황이 좋지 않아 해운회사들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가고 싶은 회사들은 채용 공고조차 내지 않았다.
낙담하고 있던 나에게 멘토님께 연락이 오셨다.
“해운회사 영업팀은 아니지만 너가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 특히 사장님이 인품이 훌륭하시고 업계에서 평판이 좋으시고 마침 사람을 뽑고 있으니 한 번 지원해 봐라.”
멘토님께서 추천해주신 회사는 선박 브로커 회사였다.
선박 브로커는 해운회사 영업팀 다음으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므로 망설이지 않고 지원하게 되었다.
선박 브로커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선박을 가진 선주와 화물을 가진 화주가 계약을 채결할 수 있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일을 한다.
화주가 중동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석유를 운반할 배를 찾고 있을 때, 화주와 선주가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조건으로 화물과 배를 매칭 시켜주는 것이다.
선주와 화주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선박에 대해서도 잘 알고, 화물 계약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해운 시황의 흐름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하고, 외국의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실력은 필수이다.
영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는 자신이 있었고, 멘토님이 선물해주신 ‘용선 계약서’는 배를 타는 기간 중에 틈나는 대로 읽고 공부하여 3번씩 완독을 한 상태였다. 용선 계약서는 선박 브로커에게는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어서, 실무에서 계약을 채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중요한 내용이 용선 계약서에 들어 있었다.
영국 유학을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취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박 브로커 회사의 사장님께서는 내 영어 실력과, 일등 항해사 경력, 용선 계약서를 공부한 열정을 좋게 봐주셨다.
사장님께서는 내게 화물 계약을 채결하는 영업직무를 맡게 해 주셨다. 승선만 하고 내린, 육상 경력은 아예 없는 초임 직원에게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반적으로 선박 브로커 회사에 취업하게 되면 바로 영업 업무를 하지 않고, 운항이나 기초적인 업무들을 일정 기간 한 후에 영업 업무를 맡게 된다.
선박 브로커 회사에서 영업 업무는 제일 중요한 업무이고, 선박과 화물 계약에 대한 전문지식과 고객들을 상대할 줄 아는 영업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사장님께서는 부족한 부분은 가르치면서 하면 된다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믿고 일을 맡겨 주셨다.
당시 선박 브로커 회사에서 영업업무를 하던 담당자들 중에 내가 가장 어렸고, 다른 회사에서는 대부분 30대 후반 이상의 베테랑들이 영업업무를 하고 있었다.
배를 내리고 한 달 밖에 안 지난 시점에서 면접을 봤고, 사장님께서는 2주 후부터 출근 할 수 있겠냐고 말씀하셨다.
배를 그만 타게 되면 한 달간 남미 여행을 가는 것이 오랜 버킷 리스트였으나, 사장님과의 면접을 마치고 나서는 하루라도 빨리 선박 브로커 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에 출근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2017년 2월 선박 브로커로 나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