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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왜 별로일까

무엇을 신봉하고, 무엇을 사용하는가

by 조직실험실

"근검절약" 가훈이 액자에 걸려있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주말마다 백화점에서 명품 가방과 시계 등 온갖 사치품을 사 들고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은 금세 눈치챌 것입니다. 벽에 걸린 글귀보다 부모의 지갑이 열리는 장면들이 진짜 메시지라는 것을요. 이 집안의 사용 설명서는 근검절약이 아니라 ‘소비와 과시’가 됩니다.


회사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기업은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을 외칩니다. 하지만 임원 회의에선 여전히 직급 순으로 발언권이 배분됩니다. 임원들마저 최고 경영진들의 눈치를 보며 의견과 말을 삼켜냅니다. 젊은 구성원이 낸 아이디어는 “좋긴 한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라는 말 속에 묻혀버립니다.


또 다른 회사는 성과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실제 평가 시즌이 되면 어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팀장은 "올해는 A가 승진해야 할 차례이니 B가 양보하자." “너는 내가 작년에 약속했으니 A 줄게”라는 말을 하며 온정주의로 등급을 배분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나눠먹기식 평가는 2025년에도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호는 성과주의이지만, 실제 작동하는 가치는 ‘관계주의’에 가깝습니다.


기업들은 많은 제도를 통해 기업 가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예컨대 탄력근무제를 도입하며 “자율과 신뢰 기반의 일 문화”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습니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후배도 자리를 지키는 풍경이 반복됩니다.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는 구성원을 회의 시간에 뭉근히 나무라기도 합니다. 제도가 지향하는 ‘자율과 신뢰’는 구호로 전락하고, 실제 사용되는 규칙은 ‘상사보다 늦게 나가면 안 된다’, '어지간하면 9 to 6를 지켜라' 암묵지회사의 견고한 진리가 됩니다.


가치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는 점을 여실히 느낍니다. 경영진은 웅장하고 바른 소리 가득한 비전을 제시하는 반면 구성원들은 “그거 그냥 보여주기 아닌가요?”라며 냉소합니다. 말과 행동 사이에 벌어진 유격은 조직 내 신뢰를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이렇게 회사는 점점 별로가 되어갑니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매 순간 신봉이론과 사용이론 간의 팽팽한 긴장이 연출됩니다. 조직심리학자 크리스 아지리스(Chris Argyris)는 신봉이론(Espoused Theory)과 사용이론(Theory-in-use)으로 구분했습니다. 신봉이론(Espoused Theory)은 조직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철학과 원칙을 말합니다. 사훈, 핵심가치, 비전 선언문 속에 담겨 있는 구호들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창의성을 중시한다”, “고객을 최우선으로 한다”와 같은 문구가 바로 신봉이론입니다. 반면 사용이론(Theory-in-use)은 구성원이 실제 행동을 통해 경험하는 암묵적 규칙을 의미합니다. 공식 문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체득되는 규칙입니다. 예를 들어 “실패하면 찍힌다”,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면 안 된다”와 같은 것들이 흔히 접하게 되는 사용이론입니다. 중요한 점은, 구성원은 신봉이론이 아니라 사용이론을 보고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가훈보다 부모의 행동이 더 큰 교과서가 되듯, 조직에서도 벽에 붙은 가치보다 회의실에서 오가는 말과 행동이 더 강력한 학습 효과를 가집니다.


많은 조직에서 신봉이론과 사용이론 사이에 크고 작은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 구성원은 몰입과 신뢰를 경험하지만, 괴리가 커질수록 구성원은 냉소와 불신을 학습하고 조직문화는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게 됩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제 돌아가는 건 따로 있다”는 깨달음이 퍼지는 순간, 회사의 제도와 슬로건은 공허해질 뿐이죠.



신봉이론과 사용이론은 원래부터 완벽하게 일치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집니다. 법의 제정과 집행 해석이 달라지는 것처럼, 조직 가치도 선언과 실행 사이에는 늘 많은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예외 상황을 조항처럼 세세히 매뉴얼화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의 에린 마이어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람직한 문화를 만드는 비결은 직원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어려운 딜레마를 파악하고, 해결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조직문화는 멋진 포스터나 구호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매일 부딪히는 선택의 순간에 작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조직문화는 조금 더 세속적이고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공격적인 면모조차 필요합니다. 이상만을 외치는 허세 가득한 문구는 이제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구성원은 그럴듯한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솔직한 가치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업의 핵심 가치를 다른 기업에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면, 그 가치는 철저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화두를 일으켰고, 여전히 기업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벤치마크하는 넷플릭스의 No Rules, 자율과 책임처럼 뾰족하고 솔직한 가치는, 구성원이 실제 행동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은 여전히 ‘고객중심, 도전, 협력, 존중’과 같은 일반적이고 착하고 진부한 슬로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영진 역시 허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냉혹해 보일 수 있고, 일부는 동의하지 않을 가치관이라 하더라도, 우리 회사에는 어떤 사람들로 가득했으면 하는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투명하게 제시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객중심’이라는 가치를 생각해보면,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에 고객을 두라”는 명제는 이미 너무 당연하고 이 세상 모든 기업에 적용해도 이질적이지 않을법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고객중심 가치와 재고 관리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도 무조건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 제공하라' 로 딜레마 상황에서의 선택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제시하게 되면 어떨까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드러내는 뾰족한 제시가, 신봉이론과 사용이론을 일치시키는 힘을 발휘합니다.




회사가 별로가 되는 이유는, 제도나 시스템, 자본의 후진성 때문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간극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 '정직과 투명' 사훈이 액자에 걸려있는 회장실에서 소란을 일으키며 검찰에 잡혀가는 회장님들의 희화화된 모습은 여전히 대중에게 친근하게 소비됩니다. 구성원은 제도가 아니라 현실을 학습합니다. 진짜 변화는 멋진 구호를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사용이론을 바꾸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당신 회사의 액자 속 단어 말고, 회의실 안의 대화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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