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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Oct 21. 2024

내 졸업식에 안 간 이유3: 배움, 끝나지 않을 마라톤

Marathon that never ends

미국에서의 15년 넘는 이민 생활을 마치고 미국 명문대학에서 학사와 두 개의 석사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거나 박사 후 연구원(포닥)으로 연구를 하기 원하지만 나는 역이민을 온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물어본다. 도대체 왜 돌아왔냐고... 하지만 당시 나는 나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족으로 합류한 우리 아기까지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해야 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한국행이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해보려고 한다.



미국에서 분자세포학으로 학사를 취득 후 교육자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있던 나는 과학교육학을 석사로 취득하였고, 줄기세포학으로 또 하나의 석사를 취득하였다. 기초연구 분야로 석사까지 쭉 취득한 나는 당시 기초연구를 넘어서서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운 좋게 어찌어찌하여 발견한 유전자가 암 억제 유전자더라' 혹은 'A라는 조직에서 효능을 가진 유전자를 다른 B라는 조직에서 실험을 해보니 효과가 좋더라' 같이 '알고 보니 그렇더라'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 유전자가 찾아지는 과정부터 '분석해 보니 그랬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정량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하여 타깃 유전자를 발견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해보고 싶었다. 많은 연구실을 알아봤으나 당시 데이터분석과 세포실험실을 보유한 연구실은 많지 않았다. 또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 미국에 여러 지도교수님과 컨택을 했었지만 생각보다 당시 내가 원하는 대학으로의 박사 진학은 어려웠다. 계속 세포나 동물실험만 해봤지 데이터 사이언스에 대해 경험이 하나도 없는 나의 박사 진학을 두 손 벌려 환영하며 받아 줄 대학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의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Yale 대학에서 제안을 한 것이 2년 이상을 인턴연구원으로 일하며 그 연구실에 대해 배우고 난 후에 박사로 진학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했었다. 내가 만약 갓 석사를 졸업한 미혼의 학생이었다면 아마 젊음과 패기로 예일대가 위치한 New Haven, Connecticut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욕심만으로 이미 서부 Los Angeles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우리 집 세대주인 신랑과 갓 태어난 아이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계산기를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 운 좋게 신랑도 새로운 직장을 New Haven에서 가진다 하더라도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아이를 봐줄 보모를 구하는 것은 한인타운이 비교적 많은 서부의 Los Angeles가 아닌 동부에서 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있다. 만약에 믿을만한 보모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재정적으로 서부보다 훨씬 비싼 동부에서 쥐꼬리만 한 나의 인턴연구원의 월급으로 보모 비용까지 충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타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그 어려운 박사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돈이 많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쩌면 이러다가 나도 결국엔 대부분의 출산을 한 여성들처럼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다고 처음 생각하게 되었다. 그 현실 앞에서는 내가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왔고, 어떤 좋은 연구들을 해왔는지는 전혀 영향력이 없었다. 누구의 말처럼 결국 박사학위를 시작하고 성공적으로 마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 그리고 좋은 지도교수님이니까. 나는 당시 그 어느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없었던 것이 있었다. 내 배우자의 격려서포트였다. 대학원을 물색하던 중 당시 우연히 KAIST 한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배우고 싶던 컴퓨터 공학과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는 드라이랩(Dry lab)과 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실(Wet lab)을 모두 갖춘 연구실이었다. 신랑은 지원해 보라고 적극 응원해 주었고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그 후에 교수님께 빠르게 답장이 왔고 스카이프를 통해 1차 면접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더운 여름날, 나는 KAIST에서 다른 교수님들과 대면 면접을 하고 있었고 컨택을 한 교수님의 연구실을 투어하고 선배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출산을 한 지 10일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내가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계속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픈 것도 몰랐다. 다행히 신랑이 일하던 회사가 한국에도 지점이 있어서 이직처리를 받았고, 나의 입학 허가와 함께 KAIST 교내에 위치한 어린이집에서 우리 아이의 입학 허가도 같이 받게 되어서 내가 걱정하는 모든 것들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봄, 우리 가족은 오랜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역이민 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나서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같은 해에 둘째를 임신하여 나는 연구실에서의 최초 아이 둘 아줌마로서 많은 기록들을 세우고 경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3년 후 셋째를 임신하여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모두가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있어도 나는 아이들을 하원시키기 위해 억지로 퇴근해야 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능력을 최대치로 높이기 위해 보다 더 연구에 집중하고, 분단위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 했고, 점심시간도 아껴가며 연구하고 실험하였다. 퇴근하여 집에 와서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운 뒤늦은 밤에 못다 한 연구를 수행할 때도 많았다. 아이를 출산하고 주어진 한 달의 출산 휴가도 다 쓰지 않고 연구실로 출근하여 실험을 했고, 그러다가 손목에 산후풍이 왔다. 면역력 저하로 항상 입술은 부르터 있었고, 셋째를 출산하고 조리원에서도 논문을 계속 쓰며 모유수유를 했다.


하루하루가 육아와 그 어렵다는 박사학위 공부로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그 순간순간에 내가 배우고 발전할 수 있음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사했다. 그렇게 졸업 논문을 좋은 저널에 게재할 수 있었고 6년을 꽉 채우고 졸업하는 날, 나는 '카이스트 화제의 졸업생'으로 선정되어 많은 언론사에서 많은 인터뷰 요청과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 생에 마지막 졸업식인 카이스트 박사 졸업식도 가지 않았다. 아니 못 갔다. 이번엔 정말 가고 싶었다. 코로나는 엔데믹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 많은 학생들을 한 공간에 수용하기에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국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모든 졸업장은 집에서 수령하게 되었다.




아이 셋을 키우며 박사과정을 한다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항상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그런 열심을 다하는 삶이 당연한 것이라 가르쳐주시고 내 삶 속에 스며들게 해 주신 부모님. 어떻게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오게 되어 낯설었던 나에게, 멀리 타국에 계신 부모님의 자리를 메꿔주신 시부모님. 내가 출근해 있는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셨던 많은 선생님들. 훌륭한 학자의 표본이 되어주시고 아이 셋을 키우는 여성 과학자의 신분이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만들어 주신 나의 지도교수님. 내 삶의 원동력이 되는 사랑하는 아이들. 그리고 나의 인생의 배움이라는 중요한 모토를 아이 셋 엄마로서 마침표를 찍게 해 준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과 배움 끝에 쉬어갈 수 있게 쉼표를 찍게 도와주는 나의 든든한 삶의 동반자이자 서포터, 신랑까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에서 돈과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많은 소중한 분들의 도움으로 이 기나긴 마라톤을 힘들지 않게 이어갈 수 있지 않은가 또 한 번 깨닫는다.


나의 배움이라는 라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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