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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표 seanpyo May 12. 2021

아이와 첫 패키지여행, 미래로 보내는 러브레터

스페인 여행기



 

‘인생은 타이밍’이다. 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만 가능한 것, 지나치면 돌이킬 수 없는 것.



폴라로이드로 책 한 권, 아빠의 욕심



아이가 기억할 유년의 순간, 나는 아이의 시간에 ‘함께 떠난 여행’의 기억을 끼워 넣기로 했다. 당장 그 의미를 모르더라도 먼 훗날 부모가 된다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니, 함께한 여행은 아이의 미래로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쁜 일상으로 여름휴가마저 놓쳐버린 그해 가을, 갑자기 닥쳐왔다.

당장 며칠 뒤 떠나야 하는 휴가가 주어졌고 허겁지겁 인터넷을 검색했다. 북유럽은 이미 피요르드로 향하는 도로가 통제되어 의미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러면 남쪽으로 갈까? 어디로? 어떻게? - 아내는 열흘 이상 아이를 케어할 준비만으로도 벅차니 -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즉흥적으로 여행사에 전화했다.


혹시 일주일 안으로 떠날 수 있는 유럽여행 패키지가 있나요?




여행의 시작과 끝, 버스 기념사진




마침 있었다. 10박 11일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과 북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다녀올 수 있는 여행이었다. 아이가 2살이 되던 해부터 일본, 하와이, 먼 미서부까지 여행을 다녀봤지만 패키지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돈이 들더라도 편하게 다녀올까? 애도 어리고 이것도 경험이잖아?"



 




아이와 함께하는 패키지여행이 편할 거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걸까?  맙. 소. 사! 열아홉 시간 만에 도착한 바르셀로나. 하루 만에 바르셀로나 시내 투어를 마치고 둘째 날 밤을 맞은 사라고사의 호텔에서 우리의 기대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비야 거리 음악가



늘 아이의 보폭에 맞추며 여행해온 우리가 일상으로부터 도피하듯 떠난 여행에서 만난 시간표는 여백 없이 빡빡했다. 그날 밤, 앞으로 열흘을 더 버텨내야 한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아내를 보면서 시작과 동시에 경로를 이탈해버린 레이싱 선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론다 거리



색도 향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바르셀로나와 사라고사. 톨레도의 언덕과 골목을 카메라 두 대와 잠든 아이를 함께 들쳐 업고 올랐다. 반나절 무리를 쫓아다니다가 지친 우리는 결국 오후 미술관 관람을 포기하고 근처 카페를 찾았다. 시간표를 벗어난 잠깐의 쉼. 카페 긴 의자에 곤히 잠든 아이를 눕히고서야 나지막이 깊은숨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하고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며 짧은 시간 많은 랜드마크를 경험할 수 있는 패키지여행을 선택했고, 그에 기대어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위한 기록과 가족여행을 함께 즐기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손에 닿지 않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아빠와 달리, 아이는 가까이 손에 잡히고 발에 밟히는 것을 즐겼다.




알함브라에서 본 알바이신 풍경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 높은 언덕 위의 도시 론다, 중세의 풍경을 품은 톨레도,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알함브라 궁전,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미하스의 마을 풍경, 카사블랑카의 하산 모스크, 페즈의 복잡한 미로, 셀 수 없이 많은 볼거리가 하이라이트처럼 우리를 지나쳐 갔지만




마요르 광장으로 가는 길



정작 아이가 즐긴 것은
마요르 광장 앞 좌판에 어지럽게 흩어 놓은 장난감, 좁은 골목을 채우던 세비아 거리악사의 연주, 신트라 소박한 골목 바닥의 작고 반짝이는 돌멩이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비치되어 있던 일본 가샤폰(캡슐) 자동판매기, 까치발을 들어 닿을락 말락 하던 주차장 옆 올리브 나무의 낮은 나뭇가지...

날짜별로 한 두 개 정해진 랜드마크를 만나기 위해 견뎌야 하는 지루한 여정 속에서 아이는 얼마든지 놀이를 발견했고 순간을 즐겼다.

 

———



 

포르투갈 카파리카 해변



———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울어가는 가을의 따뜻한 볕이 카페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바닥을 어루만지듯 자리를 조금씩 겨 가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의 색과 , 소리가 돋아나 감각기관을 타고 진하게 흘러들어왔다.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짙고 부드러운 스페인 커피 같은 ‘여행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미하스



같은 곳을 함께 다녀도 사람마다 기억이 조금씩 다르다. 기대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일 터. 유명하고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함께 경험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아빠만의 '의미'였을 뿐. 여행의 행복은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아닌 무심코 지나처 버리는 걸음 사이에,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손으로 더듬어 만질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되새겼다. 아이가 잠든 카페에서 잠깐의 쉼표가 이번 여행, 가장 특별한 순간이 되었다.






이후, 시간표에 익숙해진 우리는 시나브로 침착한 부모의 모습을 되찾았다. 톨레도 일정을 마치고 론다로 향하는 길. 이미 일정은 반이 지났지만...


우리 세 식구의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한국공항공사 사외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행 영상(션표의 자연여행)

4살 아이와 스페인 여행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jyMyadV6T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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