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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니 Aug 22. 2024

반드시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건 아니다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역사상 유명한 라이벌리 중 하나이자 극적인 역전 도루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둘은 구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로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둘이 격돌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은 독일, 나아가 유럽의 미래를 결정지은 전쟁들이었다. (미국 건국, 세계대전 발발에도 영향을 준 전쟁들인 만큼 전 세계의 미래에 영향을 준 사건들이었다고 하는 게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처음 스타트 라인에 섰을 때 둘이 체급 차이는 엄청났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을 넘어 범 유럽 차원의 패권을 노리는 강자였다. 반면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봉국으로 출발한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통일 독일이란 피니시 라인에 프로이센이 먼저 도착할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벌인 세 번의 전쟁을 모두 이겼고, 산업화와 근대화에서도 앞섰으며, 최종 승리를 거머쥐고 통일의 주인공이 됐다. (물론 그 뒤에 광기의 비극이 펼쳐졌지만 오늘의 주제는 그게 아니니 넘어가자)


프로이센은 어떻게 오스트리아에서 주도권을 뺏아올 수 있었을까? 분야가 뭐가 됐건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찬찬히 따져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 선택과 집중


프로이센의 목표는 언제나 명쾌, 명확했다. 석탄과 철광 산지를 확보한다, 폴란드를 제압해 동서로 분리된 영토를 연결한다, 라인 강을 자연국경으로 확보한다, 소독일주의로 오스트리아를 고립시키고 독일 연방의 대표성을 독점한다, 최종 승리를 거둔 뒤에는 오히려 포용하는 결단을 내려 오스트리아를 항구적인 영향력 아래 놓는 데 성공하기까지. 프로이센은 눈앞의 당면과제에 집중하며 계단을 밟듯 단계적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테레지아 여제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힘을 낭비했다. 프랑스와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다퉜고, 기독교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다 발칸 반도에 발이 묶여버렸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적통이라는 집착 때문에 본토 보다 이탈리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고, 독일 연방의 리더 자리도 포기하지 못했다. 이처럼 오스트리아는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모순되는 목표들 사이에서 힘과 기회를 낭비했다.


▪ 단결은 언제나 분열을 이긴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이탈리아인이 뒤섞여 있었다. 이중 가장 비중이 컸던 독일인도 총인구의 25% 수준에 불과했으며 헝가리인(20%), 체코인(13%), 폴란드인(10%)을 배제하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수라고 부르기엔 그 비중이 너무 컸던) 이들 소수민족 중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주도의 독일 통일에 냉담했다.


반면 프로이센은 팽창하면서도 탄탄한 내부 구심점을 유지했다. 프로이센이라고 내부에 이질적 요소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작센, 바이에른은 문화나 역사적으로 프로이센과 결이 크게 달랐다. 산업화 과정에서 종교, 좌우 이념, 경제적 신분 간 갈등이 심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관세장벽 철폐’로 중소 지역, 소수 민족의 프로시안에 대한 경제적 의존성을 강화함으로써 구심력을 유지했다. 관세가 국가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이 시대에 프로이센의 결단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으며 이는 프로이센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남부 독일의 국가들마저 프로이센에게 기울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적보다 아군이 많아야 한다


프로이센은 마지막 승리를 거둘 때까지 외교적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소 공국들의 문화와 이해관계를 가능한 범주 내에서 존중해 줬고, 이탈리아와 러시아를 우호적인 입장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는 숙적인 프랑스조차도 오스트리아의 기세를 꺾어놓는 게 좋겠다고 오판하도록 유도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프로이센을 맞서야 했다. 정작 프로이센의 후신인 독일 제2제국이 전 세계열강들을 도발했다 자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중적 인식과 달리) 총체적인 국력에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크게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1870년 기준,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3천5백만 명으로 독일(4천1백만 명), 프랑스(3천6백만 명)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근대화도 독일에 뒤쳐졌을 뿐 상당한 수준이었다.


승부가 갈린 건 힘의 총량이 아니라 그 효율적 활용이었다. 후대의 한 작가는 이 시대의 오스트리아를 놓고 ‘선원들이 노를 젓는데 박자를 맞추지 못해 비틀거리는 배와 같다, 게다가 이젠 선원들이 더 이상을 노를 젓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 묘사했다, 촌철살인이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둘 모두에게 ‘원수’였던 나폴레옹은 ‘나는 언제나 다수로 소수를 이겼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신속한 기동과 집중으로 적이 결집하기 전에 승리를 거뒀다는 뜻이다. 

반드시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건 아니다. 상대보다 약해도 더 빠르고, 간절하고, 단결되고, 간절하면 이길 수 있다. 역사 속에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Note: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이센의 뒤를 이은 제2제국은 정반대로 세계대전에 임했다. 동쪽과 서쪽 어는 쪽에 집중할지 갈팡질팡했고, 동맹들과 제대로 된 공동전선을 펼치지 못했으며, 승리를 자신했다가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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