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라고 하면 맥주의 나라가 떠오른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맥주를 향한 유별난 사랑이 아무런 굴곡 없이 꾸준히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독일인들이 ‘대왕’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프리드리히 2세는 많은 업적과 몇몇 실책을 남겼는데, 그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이 1777년에 발표한 ‘커피와 맥주 성명서’이다. 여기서 대왕은 프로이센 국민들에게 커피를 멀리하고 맥주를 애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심지어는 독일의 군대가 강한 건 맥주를 마시고 힘을 얻은 덕분이며, 커피나 홀짝이는 군인들에게 전장을 맡길 순 없다는 매우 비과학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굳이 따지면 알코올보다는 카페인이 전투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실 성명서의 배경은 과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당시 프로이센은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커피를 수입해야 했다. 대왕은 자국민들이 커피에 빠져 막대한 돈이 네덜란드로 흘러 들어가는 게 싫었던 거다. 정작 대왕 본인도 샴페인에 커피를 섞어 마셨을 정도로 커피 매니아였던 걸 알면 이러한 의심은 더욱 분명해진다. 인구의 10%가 맥주 사업 종사자라는 설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컸던 자국의 맥주 사업을 보호하려는 지극히 계몽군주다운 계산도 배경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고대 시절, 한때 독일에서 맥주를 물처럼 마셨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정복자로 들어오자 갑자기 맥주를 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와인은 인간을 대담하고 생기 넘치게 만들어 주는 반면 맥주는 인간을 약하고 소극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내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은데). 이러한 와인 찬미론은 로마인들이 물러나자 곧 사라졌다.
1674년 런던의 여성들은 남편들이 커피를 마시는 걸 금지해 달라고 국왕에게 청원서를 넣었다. 커피는 남자를 참새처럼 약하게 만드는 음료라고 비판하며 60세 미만에게는 맥주만 허용하라는 주장이었다. 때문에 청원서의 배후에는 커피에게 손님을 빼앗긴 맥주 업계가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청원서를 왕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였다. 지식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 정부를 비판하는 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의 왕은 윌리엄 3세였는데 그는 본인 스스로도 딱히 강력한 왕은 아니었다.
이러한 해프닝들이 반드시 과학의 무지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에 이미, 적어도 지식인들은 과음이 비만과 혈액순환에 영향을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괴테는 독일이 일어서려면 맥주와 담배를 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삶은 우리가 인식하고 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다.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조차도 정치적 이유에 따라 때로는 멋진 것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 것으로 외면 받기도 한다. 전통을 지키라고 호소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정작 ‘성경에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꼈던 감자의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더 많은 병사들을 저렴하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과 웹툰, 기후변화, 심지어 수돗물과 타이레놀도 과학이 아닌 사회적 필요에 따라 새로운 날인이 찍히게 된다. 너무 자주 다른 인장을 찍다 보니 표지가 넝마가 될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