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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 Jul 01. 2016

겸손

마음 다스리기

본분 잊지 않기.


겸손하.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를 낮추어야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If we surrendered

to earth’s intelligence

we could rise up rooted, like trees.

Instead we entangle ourselves

in knots of our own making and struggle,

lonely and confused.  

So like children, we begin again...

to fall, patiently to trust our heaviness.

Even a bird has to do that before he can fly.”

<Rilke's Book of Hours: Love Poems to God>




죽음 앞에 겸손하라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바다의 기별>-김훈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문 저쪽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흩어져 들려왔다)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고전은 시간을 견딘 책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감동을 줄 수 있는 막대한 힘을 품고 있는 인류의 유산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고전에서의 해석을 제시한다. 일리치의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의 등장인물들의 태도에서, 각자의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인간탐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타인의 죽음은 나의 살아있음에 대한 자각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타인의 죽음은 본인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할 뿐이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음은 내가 아닌 너에게 왔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극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만큼 타인과 나의 처지를 극명하게 갈라놓는 것은 없다. 그것이 사랑하는 벗이 되었든 가족이 되었든, 일면식도 없던 남이든간에 타인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나는 아직 또 한 번의 숨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잔인하리만큼 냉정한 현실이다.  


이반 일리치는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찬 생을 살다 갔기에, 죽음의 순간에 죽음이 그와 타인을 잔인하고도 극명하게 갈라놓는 것을 목격한다. 동시에, 죽음의 순간 인간은 그저 사라질 뿐이라는 생의 덧없음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닥칠 죽음의 순간, 그 순간의 공평함이 이 차별이 일상화된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생각은 이것이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지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목민심서』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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