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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 Jun 05. 2016

변화

진실에 충실하기 위하여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는 이렇게 말했다. 

“말이든 글이든 인간의 언어 중 가장 슬픈 말은 이것이다. 아, 그때 해볼걸!”           


미국 문학의 거물이자 철학가인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 또한 인간 시각의 편협함에 대해 탐구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갇혀 있고, 아무도 편견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진실로, 단연코, 편견을 버리는데 너무 늦은 경우란 없다.



현실을 바로 보고 바로 인식하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고통을 다루는 데 필요한 훈육의 세 번째 요소는 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영혼이 성장하려면 이것이 항상 필요하다, 진실은 현실이므로 표면적으로 이 점은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거짓은 현실이 아니다. 세상의 현실을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세상에 대처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다. 


작가는 세상의 현실을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세상에 대처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세상의 현실을 덜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이 거짓과 오해와 환상으로 혼란스러워질수록, 올바르게 처신하고 현명하게 결정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삶의 영역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지도와 같기 때문이다. 지도가 진실하고 정확하면 기본적으로 우리의 현재 위를 알게 될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이 정해질 때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지도가 잘못돼 있고 부정확하다면 대개,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젠가 길을 잃을 것이다.


명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해버린다. 현실로 난 길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우리는 지도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를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더욱 커지고 정확해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가 끝날 때쯤 이러한 노력을 멈춘다. 그렇게 되면 그 지도는 작게 대충 그려지고 말아 세상에 대한 견해는 편협하고 오류투성이가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년 말기쯤 가면 노력하기를 포기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도가 완전하고 세계관은 옳다고 확신하고는 더 이상 새로운 정보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마치 지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운이 좋은 몇 사람만이 죽는 순간까지 삶의 비밀을 탐구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과 진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를 수정하고 다시 정의를 내린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 것


문득 자신이 늙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처음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나 
눈가의 주름을 발견했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 아데나 힐펀


지도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지도를 위해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끊임없이, 그리고 아주 빠르게 변한다. 어렸을 때, 젊은이였을때, 그리고 노인일때. 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현실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이 새 정보들을 흡수하려면 지도를 계속해서 수정해야 한다. 때로는 대대적으로 수정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정하는 과정, 특히 대대적인 수정은 고통스럽다. 때로는 고문을 당하는 정도로.


인류가 지닌 많은 병폐의 주요한 원인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랫동안 노력해서 겉보기에 유익하고 쓸만한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다듬어왔는데, 그것이 잘못됐다고, 지도의 대폭 수정을 암시하는 새로운 정보와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작업에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므로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고 질려버린다. 그래서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흔히 새 정보를 무시해버린다. 이렇게 무시하는 행동은 종종 그저 피하는 것 이상이 되어, 새로운 정보를 거짓되고 위험하고 이단적이며 악마의 산물이라고 헐뜯는다. 실제로 그것을 뿌리째 없애고자 운동을 벌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현실에 대한 견해에 맞추느라 세상을 뜯어고치려고도 할 수 있다. 지도를 바꾸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새로운 현실을 파괴하려 드는 것이다.


-M.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슬프다. 그저 애처롭다. 

자신의 낡은 견해와 향수에 젖어 새롭고 낯선 것들에 위협을 느낀다는 건 어떤 면에서 당연하지만, 그런 오래된 것들 안에서의 '안전함'을 고수하기 위해 스스로 편협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은 너무나 애처로운 일이다. 새로운 것을 낯설어하는 건 납득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새롭고 발전된 문화나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그것이 고결하고 충직한 행동인냥 포장하는 것은 그저 비겁한 것이다.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니체도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는 표현으로 변신을 회피하려는 사람을 경고했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도 수많은 변신의 과정을 통해 성장해나간다. (…) 만약 성인이 되어서도 학생 시절의 생각이나 행동이 반복된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과거의 허물을 얼마나 잘 벗어버렸는지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니체의 주장처럼 ‘파멸’할지도 모른다. 한편, 니체가 뱀의 비유를 통해 환골탈태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외형적 변신보다 정신적 변화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 받는 정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 그에 따르면, 정신도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 생각의 틀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바꾸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은 그의 말처럼 “정신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바뀌지 않는 생각, 즉 고정관념은 더 이상 ‘정신’이 아니다. 요컨대 정신도 환골탈태해야 한다. [27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 260~261쪽]



몇 해전, 바이칼호에서 은둔생활을 결심한 한 남자의 경험을 기록한 담백한 다큐를 봤었다. 변화를 위해 혼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에게 고독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기회이자 선물이었다.


<Alone, 180 days on Lake Baikal>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내가 바꾸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다." 

세상의 모든 다큐, 바이칼호에서의 은둔생활 중 



인생의 밤에서 대낮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힘겹게 버둥거리다 지쳐간다. 이러다 영원히 낮이 안 올지도 모른다고 포기하고, 절망으로 극한 결심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낮은 꼭 온다. 내가 생각했던 그 그림의 낮이 아닐 수도 있지만, 꼭 한 번은 찾아온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분장을 지우지도 못하고 피에로만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 서글플 것이다. 찌든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고 밤이 돼야 웃던 피에로에서 환한 대낮에 정말로 밝게 웃는 사람으로 바뀔수 있어서 네가, 내가, 우리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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