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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너 Sep 08. 2022

사랑 받을 자격

진짜 나와 마주하는 법


내가 하는 고민거리들에 대한 직언을 들려주는 스쿨 오브 라이프. 통찰력 깊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How to Get Your Parents Out of Your Head

One of the most difficult things about being human is how easily influenced we are by our childhoods — and more particularly, our parents. The human mind between the ages of one and ten is dauntingly receptive, infinitely attuned to its environment. A somewhat cold forbidding father or an erratic mother really may be all that are required to breed an elevated degree of anxiety or self-hatred that colours the next eight decades.


최근 작성하고 있던 글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에 관한 글이었는데, 청소년기 시절부터 꾸준히 생각해왔던 주제이다. 성인이 된 지금, 보다 객관적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회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성찰하며 좀 더 포괄적인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글을 완성하기 직전, 마침 시의적절하게 영상을 보게 되었다.



특별하다는 말은 사랑이 아니다.


“너는 특별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어.” 라는 말은 오히려 아이들을 용기내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해.” 하고 말해주는 편이 훨씬 낫다.


아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기대를 받으며 자란다. 그러다 양육자의 기대에 못 미쳤을 때 실망과 질책의 반응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어떤 일에 도전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게 된다. 실패를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못해 공포스러워지고 예쁘고 말을 잘 들어야, 공부를 잘 해야, 시험을 잘 쳐야, 반장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머물렀을 때,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모멸감과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과 관심을 얻는 것이 곧 생존과 직결된다고까지 여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한 번 박히면 이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미의 기준이나 지능의 우월함, 학업적 성취에 집착하고 그를 통해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 하게 된다. 하여 무의식 중에 항상 타인의 시선 앞에 자신을 앉혀놓고 상상 속 대상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으로 습관적으로 재단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알아볼 수도 없고, 인정하지도 못하게 된다.


건강한 자아가 자라날 틈도 없이 살면서 계속 튀어나오는 도전의 과제들은 실패가 두려운 아이들에게는 죽기보다 싫은 숙명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 때 생겨나는 트라우마는 인격 형성을 거치는 과정의 아이들의 정신에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실패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삶의 이벤트들 (예를 들어 시험, 면접, 혹은 평가가 포함된 일들 모두)이 늘 버겁고 피하고만 싶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삶이 고되고 늘 벅차기만 할 뿐인 아이들은 이러한 극심한 걱정과 스트레스에 불안장애가 생겨나기도 하고, 도피처로 약물 혹은 비행의 길로 빠지거나 충동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기도 한다.



부모님의 기대치에 부응해야 비로소 따뜻한 미소와 칭찬을 받을  있었던 아이는  순간 부모에게  보이려 노력하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있게 나서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기 보다는 눈치를 보며 상대방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려 무한한 노력을 하게 되며, 그러는 와중에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 잘하는 ,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탐색과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기에  비고 공허한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자신 스스로마저도 자신을 외면한  오랜 시간 애쓰다보면 지칠데까지 지쳐버린 자아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울면, 아파하면, 심각한 병에 걸리면, 혹은  생을 마감하면  때는 다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 줄까? 하는 생각으로 슬픈 생을 마지막 관심으로 보상받으려는 생각이 들지도 른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자란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서로의 삶 속에 흡수되어 성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력이 자신의 정서와 지능 발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상, 부모의 기대와 애정은 큰 확률로 아이의 무의식을 통제 혹은 지배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조건부 애정과 관심,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히 드러내는 기대와 소망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성장하면서 이들의 의사결정과 선택, 가치 판단 등에 무자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The way we think seems to be the result of our own will we seldom come across any voices or attitudes that feel actively foreign or externally sourced. Nevertheless, given how long we were exposed to them and at what formative stages, our parents may have left more of a mark on us than we normally recognize-- and maybe constantly commenting on our lives from inside like a chorus of unhelpful marionettes.


똑똑한 아이들일수록 더 그렇다. 기민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여, 갈등없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사랑을 받고자 하는 아이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관심과 애정으로 보상받는 패턴이 반복되면, 그것이 곧 삶의 이유이자 지속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이 문제인지 모른다. 그렇게밖에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당연하게 동기부여는 칭찬에 대한 기대로 충분하고, 피나는 노력에 대한 보상은 관심 혹은 사랑으로 충분하니까. 그것보다 더 크고 의미있는 삶을 누리는 것은 그런 부모들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여준다. 그들은 많은 질문을 하는 아이보다는 말을 잘 듣고 순종적인 유순한 아이들을 편해한다. 어른들을 "편하게" 해주는 아이들은 예쁨받는다. 아이들은 안다. 자신들의 작은 행동에 보이는 부모의 표정 변화, 작은 말투의 차이, 행동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민첩하게 읽어낼 줄 아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어쩌면 생존의 문제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When we fail, a voice inside us may say you should never get above your station. When a relationship breaks down, an inner voice might whisper, never expect anything from others. When a nasty rumors spreads about us, we hear, you were always too impulsive. We might, without thinking too hard, allow our defences to choke our spontaneous insights. what our inner parents have to say is often not especially enlightened or in line with what we want for ourselves. and yet we can observe how deeply such ideas sink into us nevertheless.


문제는 실패했을 때이다. 부모들은 교훈과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따가운 화살로 아이들의 서툰 발걸음과 미숙한 시도를 비난하고, 신뢰를 꾸짖고 다그치며, 선택을 공격한다. 결과론적이고 착오적인 반응이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의심하고, 자신감을 상실한다. 다시는 도전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며 열린 기회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아이들은 위기에 봉착하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내면의 부모가 지시하는대로, 무조건 성공하고 무조건 착해야 예쁨 받기 때문에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회복 탄력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과 착한 아이 컴플렉스

폭력적인 부모, 무관심한 부모, 다그치는 부모 등 여러 부정적인 양상을 보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그러지 못한’ 가정에서 살아간다.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성장한 아이는 감정에 서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려워하고, 낮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아프게 하여 내면의 슬픔과 아픔을 돌보지 못한 채로 성장한다.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지 않고 성장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정체성을 상실하며, 가짜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면서까지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린 시절 주 양육자로부터 버림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기 공포가 심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방어 기제의 일환으로 본다. 즉, 부모와 정상적으로 정서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을 때,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착한 아이’를 연기하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연기는 늘상 지속되고 멈추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가며 애착의 대상이 부모에서 친구나 연인, 배우자로 변모하더라도 같은 양상을 띠며 반복된다) 연기하는 동안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예상하겠듯이, 종내에는 초라해져가는 자신의 모습에 공허해져 더욱 더 애정과 인정에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고는 스스로 파멸에 이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고 사회의 적정 기준에 부합해야 사랑과 관심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 그것에 실패하여 사랑받지 못함을 느끼는 아이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되고 그것을 자신이 책임으로 여기고 자책하며 고통받는다. 그리하여 더 많은 노력으로 모두에게 예쁨받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가면서 완벽하게 일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한 채 모두에게 착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이는 엄청난 피로감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은 그 아이가 못나 보일 때 더욱 살피고 보듬어주는 것 아닐까?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자기의 내면적 가치를 믿지 못하므로 자기의 외적 가치를 증명하는 데 목을 매며 평생을 소모하는 반면 아이가 약점을 보이고 실패할 때 부모가 그대로 받아주고 믿어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받아들인다.

아이는 자신을 한결같이 믿어 주는 부모 앞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꽃을 피우듯 마음을 피워낸다. 그래서 비로소 한 인간, 특별하지는 않아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유일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착한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방법


그러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흘러가버린 유년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착한 아이들은 가망이 없는걸까? 실패하고 만걸까?


Our parents views merge with our own and form the new hybrid rendition of our "perspectives"indistinguishable from our independent minds.


정서 발달 과정에서 부모(양육자)의 시각이 아이들의 시각과 뒤섞여 부모의 이상이 투영된 가치를 기반으로 형성된 시각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살아온 아이들은 스스로를 부모와 인격적, 정서적으로 분리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먼저 감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면 아이의 상처를 마주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 시시각각 찾아오는 부정적 긍정적 감정들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자. 두려운 마음에 긴 시간을 외면해 온 사실을 직접 마주해야 뭐든 시작할 수 있다. 감정은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과 관계를 맺는 데 건강한 연결고리로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감정이 발생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자연스레 표출하는 것 또한 필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기억하자. ‘끝날 것 같지 않은 슬픔도 결국에는 끝이 난다.’


 또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나를 이야기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더 큰 상처로 돌아올거라는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 조금씩 용기를 내어 노력해보면 열린 마음만큼 넓어진 세상이 보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양육자와 물리적, 감정적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재하기를 선언하며 어릴적 흡수했던 부모의 기대를 우리의 자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도록 해야 한다. 보내주자. 그리고 자유로워지자.


단적인 예로,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난다면, 우리는 상처 부위를 소독하여 깨끗이 하고 연고를 발라 새 살을 돋게 한다. 그러나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면 우리는 그 즉시 자신을 외면한다. 상처와 그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마주하지 않고, 애써 거짓된 모습으로 치장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제 자리에서 삶을 영위해나간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치료해줄 수 없다.


Our parents views merge with our own and form the new hybrid rendition of our "perspectives"indistinguishable from our independent minds.



그리고 진짜 나와 마주하는 법


요즘 많은 전문가들이 대중매체에 나와 공공연히 선언한다. 부모의 조건부 사랑은 명백한 정서적 학대라고. 하지만 지난 날의 수많은 부모들에게 말해보면 같은 대답이 돌아올 거라 확신한다. "그땐 다 그랬다"고. 학대는 많은 경우 대물림된다. 제대로 양육받지 못한 부모들이 잠재적 나쁜 양육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는 의식적으로, 나의 말과 행동이 내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한 번씩은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습관적으로 내가 배웠던 대로, 내가 자랐던 대로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겠지만, 내가 부모가 아니라 이 아이에게 남이었어도 같게 행동할 것인지 돌아보고 조심스럽게 내 말과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해본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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