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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보 Sep 03. 2022

2022.6월 문화정책 동향리뷰

6월 키워드 : #기후위기의 쓴 맛, #K-컬쳐의 이름값

                  #혐오, CP(Culturally Pointless)한 PC(Political Correctness)그리고 참사



2022년 6월의 날씨는 봄 가뭄, 장마철 폭우, 한여름 폭염이 철없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이제 기상특보 앞에는 “사상 최고”, “살인적”이라는 수식어들이 익숙하게 따라 붙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제트기류의 심술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이제 서막일 뿐”(매일경제, 2022.6.14.)이라는 말에는 암담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에 할머니로 변장한 남성이 케이크를 던진 이유도(BBC뉴스 코리아, 2022.5.31.),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소·양 트림세를 부과하겠다는 것(경향신문, 2022.6.10.)도 다 기후위기 때문이랍니다. 미국을 덮친 “죽음의 열돔” 아래서 하늘 향해 네 다리 뻗은 채 죽은 소들(중앙일보, 2022.6.19.)이 무슨 죄입니까? 기후위기 뉴스만 보면 우울해(한국일보, 2022.5.26.)진다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답니다. 본인이 살아갈 미래의 환경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찾겠다고 '기후위기 헌법소원'(리걸타임즈, 2022.6.13.)을 제기한 어린이들은 기특합니다. 농부는 올 봄 최악의 가뭄으로 “오이가 쓰다”(한겨레21, 2022.6.22.)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기후위기의 쓴 맛이 아니라 푸른 지구 위에서의 즐거운 인생의 단 맛을 물려주려면, 지금 당장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프랑스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이름이 호명되었습니다. 미국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도 어린 한국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존경을 담아 호명되었구요.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미국에서 “아시안 문학의 르네상스”(중앙일보, 2022.6.30.)를 이끄는 한국계 문학인들의 활약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K-팝, K-스토리, K-콘텐츠로 한국문화가 세계 문화시장에서 자주 호명됩니다. 소위 K-컬쳐의 이름값이 높아지고, 우리의 자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반면 특정 대기업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전체는 커져도 가려진 부분은 고사하는 영화계 상황(미디어오늘, 2022.6.1.)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잠시 활동 중단을 선언한 BTS 멤버들이 “K팝 아이돌 시스템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다”(중앙일보, 2022.6.16.)고 지친 소회를 밝힙니다. K-콘텐츠의 ‘가성비’가 떨어질 때와 OTT 플랫폼과의 적절한 관계(미디어오늘, 2022.6.30.)를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소련이 1958년에 개최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 반 클라이번은 “미국의 스푸트니크”로서 냉전 국가의 이름 높이기 행사에 불려 다니다가 결국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은 남기지 못하고 콩쿠르를 남기는데 그쳤다는 이야기(국민일보, 2022.6.30.)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값하기도 어렵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재미있게도 6월에는 이름 관련한 기사들이 많았습니다. 터키는 나라 이름을 “튀르키예”로 바꾸었고(한국일보, 2022.6.2.)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역 이름들을 팔아서 적자해결(중앙일보, 2022.6.14.)에 애쓰고     있답니다. “왕릉뷰 아파트”에게 이름을 빼앗긴 “아파트 뷰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 이름을 유지할 수 있을지(중앙일보, 2022.06.02.) 걱정스럽습니다. 유명인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퍼블리시티권’ 보호를 골자로 하는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이 6월8일부터 시행(중앙일보, 2022.6.9.) 되었습니다. 같은 날 송해 오빠는 안타깝게도 백수(白壽)가 되지 못하시고 “영원한 전국노래자랑의 MC”라는 불후의 이름을 가지고 영면(연합뉴스, 2022.6.8.)하셨습니다.


    “상식”이라는 말은 사실 그 뜻처럼 편안하지 않고 매우 논쟁적인 말입니다. 한번쯤 들어보았을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처럼, 시대와 조건이 바뀌는데도 늘 상식일 수 있는 상식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상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주류 소수자 그룹은 주류의 헤게모니 상식에 상처받으며 살아가기 십상이지요. 비장애인들뿐인 이미지뱅크(미디어오늘, 2022.6.13.)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상식은 장애인들에게는 상처가 됩니다. 대중이 비상식적인 것이라고 동의하는 것에 대한 혐오는 정당화되기 쉽습니다. 혐오를 부추기는 자들이 상식을 들먹이며 평범함을 추구하는 이유입니다(한겨레21, 2022.6.22.). 이에 저항하여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표현과 사회적 통념을 지적하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개념을 부여잡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말이 그 의도대로 작동하려면 우선 “정치적”이라는 말의 진실함을 되찾아야 하겠지요. 애당초 너무 교조적인 정치적 성향에 대한 풍자를 위해 쓰인 PC를, 정말로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비주류 소수 집단의 차별문제를 지적하는 용어로 선택한 것부터가 한계 아닐까요? 사고를 반영한 말이 또 다시 사고를 지배하기에 제대로 된 말을 쓰자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말이 사고를 가로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총기소지를 포함하여 개인의 자유가 최고의 상식인 미국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또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주류 백인그룹이 저지르는 참사(국민일보, 2022.5.30.)를 법으로 막지 못하는 이유 또한 “정치적으로만 올바른”, 형식화된 정의 때문이 아닐까요? PC는 이제 대중문화의 중요 코드로도 소비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피로감도 감지됩니다(중앙선데이, 2022.5.28.). 동시대 사회구성원들에게 문화적으로 공감되지 못하는(Culturally Pointless), 즉 CP한 PC는 그 아래에서 곪아 터지고 있는 혐오와 사회적 분열을 덮어두는 휘장에 불과합니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의 저자는 “더 이상 ‘너희는 나빠’라는 도덕적 호소만으로는 지금 한국 사회에 편재한 혐오에 제동을 걸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반전운동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진 러시아의 예술가들처럼(주간조선, 2022.6.22.), 국가든 사회든 주류 권력이 강요하는 상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예술이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정치적으로 소란스럽지 않기 위해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보다는 토론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사회적 분열 또는 물리적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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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AC 문화예술 정책동향]은 문화, 사회, 기술, 정책, 해외, 연구 동향관련 기사를 선별해서 격일로 제공하는 탤레그램 채널 [문화+정책_뉴스스크랩] 중에서 간추린 주요 이슈들과, 매달 셋째 주에 서울문화재단 블로그에 연재되는 [이슈페이퍼_문화+정책]의 요약본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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