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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Aug 08. 2023

온유의 자리

7. 슈퍼 온유

   아침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어요. 눈가를 부비며 블록을 챙겼지요. 친구들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대부분 상자에서 처음 나오는 것들이에요. 새로 만든 슈퍼마리오도 챙겨 보조가방에 가득 담아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어요.

   -난 이제 일어났어ㅜ. 먼저 학교에 가 

   민지가 보내 온 문자에 답을 하고 학교로 향했어요.  

   정류소 근처는 아주 깨끗해졌고 벤치는 새것처럼 반들거렸어요. 가로수에서 떨어진 잎사귀가 벤치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어요. 버스를 기다리던 한 누나가 벤치에 앉으며 나뭇잎을 주워들어 옆에 있는 친구에게 장난을 쳤어요. 어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거두고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어요. 어제까지 보던 지저분했던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청소를 하지 않던 자리를 비워내고 닦아내니 이렇게 달라지다니요. 새삼 유나짱이 대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까?’

   지저분한 얼굴 사이로 번뜩이던 아저씨의 눈동자가 떠올랐어요.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게 만든 유나짱을 원망하고 있을까요. 아저씨가 밉기도, 불쌍하기도 하면서도 차라리 잘된 일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말끔해진 정류장을 뒤로 하고서 서둘러 학교로 향했어요.

   쉬는 시간이 되어 책상에 블록을 쭉 늘여놨어요. 민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떡 벌렸어요.

   “와! 이걸 다 만들었단 말이야? 대단하다.”

   “그러네, 정말 많다! 난 이거. 예전에 만든 거야.”

   여울이는 자신이 만든 것도 꺼내었어요. 다양한 비즈로 만든 새와 다람쥐였어요. 민지는 감탄하며 말했어요. 

   “여울이도 정말 잘 만드네. 다들 솜씨가 좋다. 왠지 부러운걸.”

   여울이가 쑥스러운 듯 말을 받았어요.

   “야아, 민지 넌 운동도 잘 하고 시원시원하잖아. 난 네가 부러운데.”

   “맞아, 맞아.”

   나도 고개를 주억거리자 민지가 부끄러운 듯 크게 웃었어요. 

   “하여튼, 다들 잘 하는 게 다르니까 더 좋다. 그렇지?”

   맞는 말 같아요. 셋 다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다르니까 더 재밌고 좋아요. 서로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와, 이게 다 뭐야?”

   준영이가 고개를 쑥 내밀고 다가왔어요. 다른 아이들도 주변에 모여들었어요. 내 생각보다 만드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옥실옥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볼록 하나가 내 손에 튕겨 날아가 버렸어요.   

   “주워올게.”

   블록이 하필이면 혜리 자리까지 날아가 버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주우려는데 “거북이. 좀 빨리 주워.” 짓궂은 혜리 목소리와 옆에 있던 애들이 킬킬 웃는 소리가 머리 위로 들렸습니다. 

   ‘어쩌지.’

   나는 블록을 꼭 쥐었어요. 이대로 가버리면 예전과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어요. 힘든 말이라도 꼭 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내가 몸을 일으켜 혜리에게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어요. 

   “내가 좀 느린 건 맞는데 그렇게 안 불렀으면 좋겠어. 자꾸 그렇게 부르면 기분이 상한다고.” 

   “어, 어?”

   혜리는 눈을 껌뻑이며 어쩔 줄 몰라 했어요. 혜리 얼굴이 불타는 석양처럼 벌게졌어요. 옆에 있는 친구들도, 서인이 조차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누가 잘했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기분이 개운했어요. 이제 어느 누가 놀려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밀렸던 숙제를 한 번에 해치운 것 마냥 후련했어요. 자리로 돌아가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반문수가 나를 보고 있었지요. 심장이 순간 벌렁댔지요. 

   ‘아니야. 이제 괜찮아.’ 

   나는 문수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어요. 지금껏 외면했던 시선을요. 문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 맞나 봐요. 말하지 않아도 문수의 기분을, 문수는 내 기분을 아는 것 같았거든요. 결국 반문수가 입모양으로 짧게 말했어요.

   “뭐?”

   “뭘?”

   내가 지지 않고 되물었더니 문수는 입을 다물었어요. 그리고는 엎드려버렸어요. 

   자리로 돌아가자 수업 종이 울렸어요.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문수의 눈빛이 마음에 남았어요. 방귀뀐 사람이 성낸다더니. 딱 그 모양이에요. 조금은 미안해하는 거 같은데. 조금은 후회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문수의 미운 눈빛보다 덩그러니 앉은 뒷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민지와 나는 이제 늘 함께 등교를 합니다. 민지가 의외로 덜렁대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민지의 늦잠 때문에 함께 뛰어서 등교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소소하게 챙겨줘야 해요. 춤 진도도 제법 나갔지요. ‘림보 림보 느림보’ 소리도 반에서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등굣길에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였어요. 유나짱이 녹색 조끼를 입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유나짱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다시 일어서면 좋겠던 걸요.”

   측은한 얼굴이었어요. 평소 유나짱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어요. 목소리에도 힘이 살짝 빠져있었어요.   

   “멀쩡했던 분이 그런 몰골로 나타나니 얼마나 놀랐다고요. 사람 일이 알 수 없다지만 휴, 그래도 그렇게 무너지면 정말 끝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민지도 대화에 귀 기울이는지 걸음이 조금 느려졌어요.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 섰지요.  

   “네, 감사합니다. 더 늦기 전에 잘 해주셨어요. 안 그래도 센터로 왔더라고요. 요즘 같은 때에 손 내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녹색 조끼 남자 말에 유나짱 얼굴이 밝아졌어요. 남자는 몇 가지를 더 묻고는 사라졌어요. 분명 정류소 아저씨 이야기 같았지요. 나는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서 다가가 물었어요. 

   “유나짱 님은 정류소 아저씨가 어디로 간지 알아요?”

   유나짱이 놀란 듯 눈이 동그래졌어요. 

   “어마, 너도 그 사람을 아니?”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정류장을 가리켰어요. 

   “늘 저 자리에 있었잖아요.”

   유나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예전에 본 얼굴이었어. 낯이 익어 설마 했는데, 우리 가게가 생기기도 전에 이 근처에 살던 분이었지. 제법 사업도 잘 되었거든. 나도 깜짝 놀랐지 뭐니. 뭐, 살다보면 생각지 못한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그 사람에게도 생긴 거지.”

   “두 분이 친하셨나 봐요.” 

   이번에는 민지가 물었어요. 유나짱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어요. 

   “얼굴만 아는 동네 분이었어.”

   나는 유나짱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친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신경을 쓰다니요. 내 표정을 보더니 유나짱이 잔잔히 말을 이었습니다. 

   “그냥 두지는 못하겠더라. 한번 주저앉으면 정말 끝이 될 수도 있거든. 그걸 알면서 어째 그냥 두겠니. 뭐 내가 아무리 그래도 결국 결정은 자기가 하는 거지만. 다행히도 일어설 의지가 있었나봐. 어쨌거나··· 아이고, 잠깐, 지금 시간이 몇 시니? 너희 어서 학교가야지.”

   “아, 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뛰다시피 걸었어요. 시원스레 손을 흔드는 유나짱의 얼굴에 맑은 햇살이 반짝였어요.        

   일주일 만에 찾은 시청각실은 커튼을 젖혀둬서 그런지 햇살이 환하게 내리고 있어요. 아이들은 방석을 가지고 와서 둘레둘레 둘러앉았지요. 서인이는 여전히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어요. 오늘은 채점할 것이 없나 봐요.

   지난주에 이어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장면들이 펼쳐졌어요. 기세등등하던 사자 주위를 사슴들이 덤벼들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슴은 다행히 몸을 일으켜 피했어요.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사슴들의 기습에 놀란 사자는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게 아니겠어요. 

   뒤를 돌아보니 덩그러니 앉아있는 반문수가 눈에 들어왔어요. 

   ‘쟤도 몰랐을 거야. 자리가 바뀔 수 있다는 걸. 나도 몰랐잖아.’ 

   나는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어디가?”

   민지가 소곤대며 물었어요.

   “잠시만.”

   나는 문수가 앉은 자리 옆에 새로 만든 슈퍼마리오를 살그니 놓았어요. 문수가 눈만 껌벅이며 나를 봤어요.

   “이게 뭐야?”

   “···슈퍼마리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어요. 이제 나는 슈퍼 온유가 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잘 모르겠어요. 반문수가 슈퍼문수가 될 수 있을지는요. 그건 이제 문수가 정하는 거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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