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 Aug 08. 2023

마법샴푸

짤막한 동화 한편

       

  이야기 하나 들어볼래? 

  이 도시에서 있었던 이야기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른들은 모르는, 영원히 모를 이야기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만 내려오는 건데 너도 이제 7살이 지났으니 알려줄게. 

  거기 알지? 학교 뒤에 있는 큰 호수 공원. 공원 중간쯤에 호수가 있고 그 옆에 매점이 몇 개 있잖아. 사실 그 중에 하나가 ‘마법샴푸’라는 가게였어.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말이야. 그때 호수 근처에 그 가게만큼 멋진 곳은 없었단다. 

  마법샴푸 가게는 하얀 소용돌이가 그려진 붉은 천막이 둘러 쳐 있었어. 뾰족하게 솟은 꼭대기에는 은색 바람개비가 힘차게 돌고 있었지. 저 멀리 공원 입구에서도 한눈에 들어왔단다.  

  입구에는 언제나 한 줄로 길게 늘어 선 아이들이 빨리 들어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지. 그러면 그 가게의 주인인 미스터 장이 환한 얼굴로 나와 어린 손님들을 맞이했어.

  “오늘도 안녕! 여러분~. 자, 자. 조금만 기다려줘요.”

  미스터 장은 멋쟁이였어. 늘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특히 매기 수염 손질에 공을 많이 들였지. 그런 미스터 장은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단다.

  “나는 마법의 샴푸로 머리를 감겨주죠. 여러분이 할 일? 그런 거 없어요. 편한 의자에 기대 잠시 눈만 감았다가 뜨면 끝이죠! 힘들고 우울한 기억이 모두 사라질 테니까. 새로 태어난 것처럼 행복해진답니다. 인생은 짧아요. 앞날이 창창한 우리 어린이들은 그냥 신나게만 살면 된다고요!”

  미스터 장의 말 그대로였어. 가게 입구에서 기다리던 애들의 표정을 봤다면 너도 알거야. 하나같이 훌쩍이거나 우울한 얼굴이었지. 아니면 시뻘게진 얼굴로 싸우는 녀석들도 있었어. 그랬던 아이들이 가게에서 나올 땐 모두 햇살 같이 환한 표정으로 나왔거든. 하늘에 떠 있는 고래구름을 발견한 것처럼 신나는 걸음걸이로 말이지.

  호숫가를 시작으로 차츰 차츰 도시에 소문이 퍼졌어. 물론 우리 어린이들 사이에서만 말이야. 미스터 장의 마법샴푸 가게에는 점점 단골 고객이 늘어났어. 

  너도 지금 그렇지만, 그래. 우리한테 힘든 일이 좀 많아? 그때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어떤 애들은 하루가 멀다하도록 발 도장을 찍었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조이가 강아지 머핀과 함께 호수를 걷고 있었지.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호숫가로 오려 던 건 아니었어. 머핀이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가는 곳으로 조이가 끌려 온 거였지. 머핀은 산책을 좋아했거든. 그리고 조이는 그런 머핀을 사랑했으니까. 

  조이가 붉은 천막의 가게를 발견하고는 맨 뒤에 줄 서 있는 한 아이에게 물었어.

  “여긴 뭐하는 곳이야?”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곳이야.”

  “근사하다.”

  조이도 곰곰이 생각해봤어. 조이의 나쁜 기억은 뭘까 하고.

 앞집 아저씨의 술주정으로 시끄러울 때가 종종 있었지만 아주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어. 머핀이 조이의 아끼던 인형을 물어뜯었던 기억도 떠올랐어. 그것도 일부러 지울 만큼은 아니었어. 처음엔 화도 났지만 벌써 삼일이나 지난 일이었거든.

  그때 마법 샴푸 가게에서 유라가 나왔어. 머핀이 유라를 보자 낮게 ‘그릉’ 거렸어. 조이는 얼른 머핀을 껴안았지. 어제 유라가 머핀에게 돌을 던졌었거든. 유라는 신경질이 나면 작은 동물을 괴롭히곤 했어. 하필이면 머핀이 어제 그 화풀이 대상이었던 거지.

  “아, 조이!”

  유라가 반갑게 말을 걸었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조이에게 건네줬어.

  “기분이 너무 좋아. 이거 너 먹어.”

  조이가 쓴 웃음을 지었어. 유라는 힘찬 걸음으로 다른 친구와 함께 공원을 빠져나갔어.

  “나쁜 기억을 지웠나보네. 그래도 제멋대로인건 여전해.”

  조이는 뭔가 비겁하단 생각이 들었어.  

  ‘치, 뭐야? 그럼 어제 일은 나만 기억하는 거잖아.’

  머핀이 조이의 팔 안에서 ‘왈왈’하고 짖었어.

  “그래, 머핀. 너도 기억하잖아. 근데 쟨 완전 잊었나봐.”

  조이는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지. 조이는 머핀을 괴롭히던 유라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거든.  

  “오우, 빨간 머리 꼬마아가씨, 들어갈 건가?”

  조이가 고개를 들어보니 웬 우스꽝스런 콧수염의 아저씨가 싱글싱글 웃고 있었어. 

  “아뇨, 전 지우고 싶을 만큼 힘든 기억이 없는 거 같아요.”

  “오! 그럴 리가.”

  미스터 장이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어.   

  “좀 전에 표정이 좋지 않던데. 뭔가 힘든 일이 있는 거지?” 

  “아뇨, 괜찮아요.” 

  조이는 이 정도 기억을 지우는 건 정말 유치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조이가 돌아서는데, 낮게 중얼거린 소리가 귓가에 들렸어. 

  “아주 행복에 겨워 사는 꼬마 아가씨인가 보군.”

  조이는 기분이 나빠졌어.  

  ‘저기 절대 안가. 나쁜 기억을 지워주는 곳이라면서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드는 곳이잖아.’

  머핀이 조이를 올려 보며 다시 한 번 ‘왈왈’하고 짖었어. 마치 조이의 마음을 알아 챈 것처럼 말이야. 조이는 ‘행복에 겨워’사는 아이가 아니었어. 그냥 우리 같은 평범한 아이였지.      

  공원에 다녀온 조이는 친구들을 가만히 살펴봤어. 확실히 예전보다 밝아진 애들이 많아진 걸 알게 되었지. 힘들거나 우울한 고민을 말하는 친구가 적어졌다는 것도 말이야. 하룻밤만 지나면 다들 생기가 넘쳤어. 매일 만나는 나래 조차도 어제 분명히 엄마한테 혼나서 울어놓고, 오늘은 기억도 못하는 거야. 

  조이는 좀 혼란스러웠어. 친구들이 밝아진 건 좋았는데 함께 고민을 나누던 마음까지 사라진 거 같아서 말이야. 

  “내게 힘든 일이 생기면 어쩌지?”

  “걱정할 거 없어. 마법의 샴푸가 있잖아.”

  나래가 풍선껌을 팡 터트리며 까르르 웃었어. 조이는 왠지 쓸쓸한 느낌도 들었지.

  그런데 말이야, 살다보면 어떤 순간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도 하잖아. 아, 무슨 얘기냐면 머핀이 조이 곁을 떠나게 된 거야. 그날 머핀은 평소보다 더 흥분해 있었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늘을 보고 마구 짖기도 했어. 반나절이 지나도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지. 너무 날뛰어서 목줄이 느슨해져 버린 순간에 머핀이 차도로 뛰어 나가버렸던 거야. 안타깝게도…. 그래, 그렇게 조이는 머핀을 잃었어. 한순간에 말이야. 

  조이는 미칠 것 같았어. 

  ‘다시는 머핀을 볼 수 없다니! 더 이상 머핀을 만질 수 없어.’

  조이 마음속에 하늘보다 더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어. 심장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지. 태어나서 그렇게 힘든 일은 처음이었던 거야. 조이는 매일매일 이불 속에서 펑펑 울며 머핀의 따뜻한 체온을 곱씹고 또 곱씹었어. 텅 빈 마음에 머핀의 무덤을 찾았지만 조이 손에 남은 건 풀과 흙뿐이었지. 학교에 다녀오면 늘 마중 나와 있던 머핀은 더 이상 없었어. 조이는 점점 우울해져갔어. 

  나래가 안타까운 마음에 말했어.

  “오, 조이, 샴푸 가게에 다녀오지 그래.” 

  조이 마음이 흔들렸어.

  “머핀이 죽었다는 기억을 지우면 난 행복해질까?”

  조이는 곰곰이 생각해봤어.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너무 힘드니까. 그게 맞는 건지도 몰라. 그래도 머핀이 서운해 하진 않을까.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길을 걸었어. 머릿속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엇갈리며 파도처럼 솟아올랐다가 밀려갔지.

  어느덧 조이는 발걸음을 멈췄어.  

  “안녕. 그때 그 꼬마 아가씨구나.”

  미스터 장이었지. 조이도 모르게 마법샴푸 가게 앞까지 온 거야. 잊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 들었거든.

  “아저씨…. 기억을 지우면 정말 행복해 질까요?”

  “오호~, 귀여운 꼬마아가씨. 이런, 눈물이 그렁그렁 하구나. 걱정 마요. 걱정 마. 머리를 말릴 때쯤엔 아마 하늘을 나는 기분일 걸.”


  조이는 미스터 장을 따라 가게 안으로 터벅터벅 들어갔어. 미스터 장은 구두 뒤축을 ‘따닥’ 부딪치며 가볍게 콧노래도 흥얼거렸지. 

 이 도시에서 오지 않았던 단 한명의 아이가 드디어 오늘 찾아 온 거였거든. 

  가게 안에는 폭신해 보이는 하얀 털 의자가 있었어. 앉으면 금세 잠이 들 것 같이 포근해 보였어. 조이는 조심스레 의자에 올라가 앉았어. 신기하게도 조이 몸에 딱 맞았지.

 미스터 장이 선반에 있던 황금색 항아리 뚜껑을 열어 샴푸를 꺼냈어. 달콤한 향이 가게 가득히 퍼졌지. 

  “금세 끝난단다. 눈 감고 편히 있어.”

  미스터 장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다가왔어. 조이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눈을 꼭 감았어. 

  “흐흐. 마법의 샴푸가 너를 자유롭게 해 줄 거야.”

  미스터 장이 샴푸를 물에 몽글몽글 풀어냈어. 신나게 손을 비비고, 조이 머리카락을 가까이 끌어당겼지. 그리고 조이 귓가에 낮게 속삭였어. 

  “자, 이제 네가 지우고 싶은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 영원히 사라질 거야.”

  미지근한 물이 조이 머리카락에 닿았어. 조이는 두 주먹을 꾹 쥐었지.

  ‘그래, 이제 힘든 기억은…….’

  조이의 머릿속에 머핀의 추억이 가득해졌어. 마음이 쩌릿했지. 금세 눈물이 차올랐어. 조이의 귓가에 머핀이 왈왈 짖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 

 달콤한 샴푸 향이 코끝 가까이에서 진하게 느껴진 순간, 조이가 눈을 번쩍 떴어.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조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어. 

  “힘든 기억 속에도 머핀이 있어요. 아무리 지우려 해도…. 힘들지만, 머핀이 죽은 건 너무, 너무너무 슬프지만 그 기억을 지우면 난 머핀의 모든 걸 기억하는 친구가 아닌 걸요. 그럴 순 없어요.”

 조이는 눈물을 닦으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어.

  “이건 너무 쉽고 비열한 방법이야!”

  조이는 머리에 물을 뚝뚝 흘리며 미스터 장이 손쓸 틈도 없이 재빨리 뛰쳐나갔어. 미스터 장은 그런 조이를 멍하게 바라 볼 수밖에 없었어.

  “안 돼! 돌아 와!”

  미스터 장이 마구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굴렀어.

  “이럴 수 없어. 왜 저 아이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야!”

길길이 날 뛰던 미스터 장이 창밖에 줄 서있는 아이들을 보았지. 힘이 쭉 빠지면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어. 

  “또 왔어…. 매번 똑같은 고민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저 줄은 도대체가 줄어들지 않아.”

 미스터 장은 머리를 감싼 채 혼자 중얼거렸어.

  “기억을 잊는다는 건 인간이 가진 큰 선물이야. 난 그저 아이들에게 그 선물을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조이가 용감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미스터 장은 처음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힘든 기억은 스스로 극복해야하는 걸, 그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지. 

 미스터 장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어.

  ‘조이는 그렇게 자라겠구나. 그리고 그런 조이의 인생에는 행복이 가득 하겠지.’

  미스터 장은 마법샴푸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머리 위로 치켜들어 바닥으로 힘껏 내동댕이쳤어. 항아리가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며 깨졌지. 그리고 깨진 틈으로 고약한 냄새의 액체가 흘러나왔단다.      

  그 날 이후로 호숫가에서 마법샴푸 가게를 본 어린이는 아무도 없었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고? 

 그건 말이야, 넌 조이를 떠올리게 했거든.(*)     

이전 08화 온유의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