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학기 대학 비평 과제-한강의 「거울 저편의 겨울 9」를 읽고
「거울 저편의 겨울 9 –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
두 눈은 이글거릴 것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심장에 바람을 넣고
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흐느끼는 빵처럼
악기들이 부풀고)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당신을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중력을 타고 비스듬히,
팽팽한 사선으로 미끄러질 것
한강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무엇도 해치지 않고 싶어 하는 영희를 빌어 동물의 죽음을 통해 삶을 지탱하는 일에 대해 반문했고,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며 죽음을 기억하고 저항하는 움직임을 드러냈다. 『흰』에서도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으나 수 시간 뒤 죽음을 맞이했던 ‘언니’를 기억하며 죽음을 다룬다. 이렇듯 한강에게 죽음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이다.
죽음을 다루는 한강의 작품세계에서 그가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것과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달리했다는 걸 생각해낸다면 심한 비약일까. 그가 11살이 되던 해, 광주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칼에 죽임을 당했다. 한강 본인은 민주화운동이 있기 몇 달 전에 서울로 이사했지만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그 사건’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는 그의 인터뷰를 생각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강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4부는 ‘거울 저편의 겨울’이라는 제목으로 동명의 연작시를 묶었다. 연작시 「거울 저편의 겨울」은 작가의 소설 『흰』과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다. 화자(혹은 서술자)가 도시로 떠난다. 그 도시는 몹시 추운 겨울이다. 「거울 저편의 겨울」에서는 거울 속에서 ‘너’를 본다. 꾸준히 ‘너’를 생각한다. 『흰』에서는 ‘나’와 ‘나’ 전에 태어났으나 수 시간 뒤 죽음을 맞이했던 ‘언니’를 생각한다.
『흰』의 관점으로 「거울 저편의 겨울」을 보면 어떨까? 『흰』에서는 너무 이른 출산에 대비하지 못한 까닭에 ‘언니’가 몇 시간 만에 죽음을 맞는다. ‘나’는 그런 언니 뒤에 태어난, 언니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존재이다. 처음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푸스와 100번째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푸스가 같은 존재라면, 그 이유는 100번째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푸스가 존재하기 위해 처음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푸스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흰』에서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언니’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을 넘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해야 하는 ‘나’와 ‘언니’는 거울처럼 뒤집힌 시지푸스이다. 이런 관점에서 「거울 저편의 겨울」 속 ‘너’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거울 속에’ 있는 존재이다.
『흰』의 ‘나’는 “나치에 저항하다 끝내 그들에게 쓸려버린” 도시에서 시간을 보낸다. 쓸려버린 시간 위에 도시는 과거를 복원한다. 토대가 남았다면 그 위에 기둥을 얹는다. 도시는 ‘언니’와 ‘나’가 보여주는 연속성과 닮아있다. 도시에서 ‘나’는 자신을 직면하고 애도와 회복을 시작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도시는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것을 회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울 저편의 겨울」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거울 저편의 겨울 9」는 죽음을 직면하기로 한 화자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동안 「거울 저편의 겨울」에서는 차갑고 하얀 이미지가 사용되었다면 「거울 저편의 겨울9」에서는 붉은 이미지가 사용된다. 「거울 저편의 겨울9」의 부제는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이다. 탱고도 플라멩코도 정열적인 춤으로 유명하다. 붉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정열적인 여성을 떠올리게 된다. 탱고는 남성과 여성, 두 명이 함께 뒤섞이며 춤을 춘다. 서로를 바라보고 또 정면을 바라보다 서로를 바라본다. 한편 플라멩코는 풍성한 프릴이 달린 여성이 스텝에 맞추어 발을 구른다. 두 춤은 비슷하지만 사뭇 다르다.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르”는 플라멩코의 동작은 그 자체로 동적이고 정열적이다.
화자는 플라멩코를 통해 죽음을 직면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죽음을 “똑바로 쏘아보”고 이를 통해 거울 속의 ‘너’를 죽임으로써 받아들이고자 한다. 거울 속의 ‘너’가 죽음으로써 ‘나’는 삶을 얻는다. 『흰』의 관점대로 해석한다면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의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하는 대목일 것이다. 애도와 회복 뒤에 삶을 살아내기로 하는 『흰』 속 ‘나’와 플라멩코를 추기로 한 「거울 저편의 겨울9」의 화자는 같은 맥락에서 삶을 결심한다.
화자가 “똑바로 쏘아보”는 것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태양이기도 하다. 맨눈으로는 태양을 바라볼 수 없다. 눈이 멀어 평생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자는 태양을 바라보기로 한다.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동경하기로 한 것이다. 태양을 바라보는 일은 곧 좌절이며 죽음이지만 그럼에도 강렬하게 태양을 바라보고 이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이기도 하다.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내기로 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상을 향하는 것이야말로 삶일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멩코는 정열적이다. 삶처럼 역동적이며 힘차다.
무엇이 삶을 삶답게 할까? 감히 죽음과 이상을 그 대답으로 하고자 한다. 삶은 유한하기에 빛난다. 유한한 기회와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해내고자 한다.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후대에 전하며, 업적을 세우고자 한다. 언제든,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삶이 변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무엇이든 이루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상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이 또렷할수록 삶도 명확해진다. 이상을 향할수록 삶에서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꿈을 가진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한강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그의 작품을 되새겨본다면 누구도 상처입지 않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누구도 폭력에 의해 죽지 않는 세상 말이다. 그것이 총칼이든 우도(牛刀)이든 누군가 타자를 죽이지 않는 세상, 그러므로 누구나 삶을 꿈꿀 수 있고 삶을 삶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이다. 그것을 위해 발목이 부러지더라도 발을 구르기로 한다면 그것 역시 삶 다울 것이다.
내가 한강에게 매혹된 것도 그가 꿈꾸는 세계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누구도 울거나 죽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왔다. 진짜로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한강의 글에 짙게 깔려있는 죽음의 냄새 앞에서 향을 피우고 삶을 결심한다. 더 많은 죽음을 목격할 수는 없으니, 나 역시 죽음을 바라보고 삶을 결심하기로 한다. 발을 구르기로 한다. 태양 또는 죽음을 똑바로 쏘아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