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의별 Oct 08. 2024

구절초 같은 그녀.

감사편지 서른일곱 번째. 때론 '하이디'인지 '빨간 머리 앤'인지.


그녀는 한 손을 턱에 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습니다.

말간 하늘이 식당 안까지 내려앉은 듯 열어젖힌 창가의 그녀 얼굴은 살포시 눌러쓴 모자 아래에서 하얗게 빛이 납니다.


'날씨가 좋아요. 삼겹살을 한번 구울까요?'

'오늘은 제가 점심 쏠게요'


그녀를 만난 건 이런저런 일들로 벼르고 벼르다 모처럼 시간들을 낸 지난 주말 오후였습니다.

어린이집원장이란 공통분모가 있지만 지금은 각기 다른 삶들을 살아가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만학도로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공통점도 있네요.


근처 널찍한 카페를 향하며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은지, 빨간 머리 앤 같은지 잘 모를 하얀 블라우스에 리넨 멜빵치마를 착용한 그의 옷차림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여전히 가을 햇살은 파랗다 못해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데 통창너머로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는 수국들이 눈 안 가득히 들어옵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수다는 끝이 없을 듯한데 아침에 텃밭에서 다듬어 놓은 열무가 생각납니다.


"아쉽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거 같아요"


그녀가 가방에서 바스락거리며 꺼내 놓은 건 구절초가 그려진 마스크입니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제겐 민트색을, 다른 한분에겐 핑크색이 전해졌습니다,


"요즘은 마스크도 패션이에요. 제가 직접 그렸어요"


저의 가슴엔 그녀의 구절초 향기가 한가득 전해옵니다.




솔* 원장님!


우리 가끔씩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만났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최선의 삶을 살아오다, 정말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이 뜬금없이 이루어졌어요.

가장 화려한 시기를 넘기고, 추하리만치 말라비틀어진 자존감으로 무너져 내릴 때 당신이 왔어요.

어린이집을 이미 정리하시고 천 원장님과 함께 저희 집 마당을 구경하러 오셨었지요.

우리는 마당에 빨간 장미가 무게를 못 이길 만큼 피어있는 곳에서 삼겹살을 구웠어요.

그리고 저에게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셨었죠.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어요. 아무리 아내도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 불편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만남이었답니다.

철저하게 홀로 있게 만드신 그분이 당신과 또 한 분을 삼겹줄처럼 엮어 주셨지요.

오직 감사와 격려로 이루어진 대화가 유일하게 가능했던 꽤 긴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장님!


원장님의 프로필 사진에 올려진 수채화 한 점이 원장님을 닮았습니다.

이제 원장님의 작품이 전시될 기회가 주어지길 기도해 봅니다.

함께 수채화를 그렸던 시간들을 기억해 보며 저도 가끔씩은 붓을 들어보겠습니다.


원장님!

원장님의 아름다운 집으로 변신한 어린이집의 남은 공간들이 더 가치롭고 귀하게 사용되는 시간이 속히 오기를 저도 기다려봅니다.

그곳에 우리들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꿈을 주인 허락도 없이 꾸어봅니다.

 

구절초 같은 원장님.


절초의 꽃말은 순수함, 어머니의 사랑, 우아한 자태라고 하네요.

꽃말까지 원장님을 닮은 구절초를 저희 마당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내년 구월초 향기가 마당에 그윽할 때 우리 다시 삼겹살 굽도록 해요.


2024년 10월 8일 바다의 별 드림

이전 12화 '원장'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