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철학]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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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잡지 않는 두 손 사이,
아슬한 틈에서 침묵과 떨림이 인다.
그 틈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하나의 고요한 세계가 열린다.
그곳이 바로, 기둥 없는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돌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닿지 않은 손과 손 사이,
존재와 존재, 이곳과 저곳, 어제와 오늘 사이—
그 아슬한 사이에 조용히 세워진다.
그 '사이'에는 망설임이 있고, 떨림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실한 공명이 일고,
말 없는 기적이 탄생되며,
무엇보다ㅡ 사랑, 거룩한 사랑이 피어난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 '사이'를 무너뜨린다.
아이와의 사이, 아내, 어머니, 친구, 동료와의 사이ㅡ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심이라는 이유로
이들과의 경계를 무시하거나 침범한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
아빠의 이름으로, 남편이나 친구의 이름으로
내 맘과 같기를 갈구하기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ㅡ ‘사이’는 숨구멍이다.
그 틈이 닫히는 순간, 사랑도 질식하고 만다.
"자네, 길을 아는가?이 강은 바로 저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인간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란 물가 언덕과 같은 법. 그러므로 길(道)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네."
-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6월 24일 중에서
연암은 말한다.
“길과 길 사이에 진리가 있다”고.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서로를 바라보되 침범하지 않는 그 사이에ㅡ
그 사이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며, 말 없는 믿음과 사랑이다. 그 사이에서, 결국 꽃은 핀다.
'사이'는 틈이고 경계이며, 길이다.
사랑은 그 경계에서의 망설임과 떨림에서 싹트고,
믿음은 말보다 침묵의 끄덕임에서 자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하되 침범하지 않고,
닿으려 하되 닿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지켜낸다.
그리하여ㅡ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 「꽃」 -
로댕의 <대성당>을 처음 마주했을 때, '대성당'이라는 제목과 두 손의 형상이 마치 데페이즈망 기법처럼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눈에 들어온 것은ㅡ 이 두 손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서로 닿을 듯 말 듯 마주하고 있는 두 손. 특히, 그 사이의 '틈'이 자꾸만 시선을 끌더군요. 어쩌면 이 작품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오묘함과 여운이 그 틈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댕은 왜 '대성당'을 두 손의 형상으로 조각했을까?
왜 하필 다른 두 존재의 손일까?
그리고 왜, 굳이 두 손 사이에 틈을 두었을까?
이 세 가지 의문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관계'를 다시 검토해보게 되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 나와 타인, 나와 세계 사이에 놓인 관계들까지도 말이죠.
당연한 관계, 익숙한 연결고리를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이'를 건너뛰지 말고 머물며, '사이'를 유지하고 응시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ㅡ
부디, 다르고 낯선 이들과 마주하는 '사이'가
충돌과 대립이 아닌, 만남과 창조의 장이 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