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고시를 준비하게 되면서 당시 멘토 교수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면담을 하던 때였다. 난 그 때, 그림을 안그리는 '무늬만 미대생'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삼수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 공부가 너무 지겨워서 갑자기 미대에 간 후, 일자리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너도 나도 다 한다는 공무원 시험을 택했던 것이다. 명확한 꿈 없이 '도망' 중심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지겨웠다. 그래도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니,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면담 중에 갑자기 교수님이 내 강점으로 '창의성'을 꼽으셨다. 아마도 법대생이나 행정학과 학생이 쓰지 않는 표현을 내가 많이 썼었나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기에, 나는 내게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받아들었던 '평균 이하의 창의성 점수'도 근거로 들면서.
그 때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수님: 평균 이하의 창의성 점수를 받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평가한거지?
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꼭 그 점수가 아니라도 전 창의성이 없는 게 분명해요. 한 번도 무슨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거나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교수님: 음... 창의성의 정의가 뭘까?
나: 크리에이티브한 것 아닐까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요.
교수님: 난 원래도 우리나라 창의력 교육에 대해 좀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어. 과연, 세상에 없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낼 수 있는 능력이 창의성일까?
나: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제 남동생은 1살에 블럭 사이에 쌀알을 넣어서 악기를 발명한 적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야말로 창의성이 있는 거죠.
교수님: 음... 그래. 남동생이 훌륭한 건 맞는데. 난 이런 생각을 해. 우리 사회가 창의성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천재라는 것도 그렇고. 난 네가 천재적이라고 생각해. 세상에 없는 것을 최초로 생각해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습득하고 종합하고 새롭게 분석하는 것을 잘하기 때문이야.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도, 충분히 창의적이지 않나?
나: 천재...요?
교수님: 응, 천재적이지. 정말 천재적이야. 난 '천재'도 '타고난 능력'에 너무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무언가를 빼어나게 잘하면 다 천재적인 거지. 거기엔 당연히 노력도 포함되고.
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전 베끼는 것을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범재 중의 범재라고요.
교수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얼마나 있겠어. 번개처럼 갑자기 떠오른 영감 같은 것들은, 난 판타지라고 생각해. 독일에선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 학문은 남들이 쌓아 놓은 것에 벽돌 하나 쌓는 것이라고. 남들이 쌓아 놓은 것을 습득하는 데에 한참의 시간과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지. 그리고 거기에 한 줌의 내 생각을 담아서 내 글을 쓰는거야. 그러니까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해. 창의력 교육은 그런 자질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나: 아....
교수님: 이제 '베끼는 것을 잘하지만 창의적이지 않다' 이런 생각은 안해도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은 너의 활동 영역을 제약하기만 할 거야. 내가 보기에 넌 누구보다 창의적이야.
나: 아....
묘하게 설득이 되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창의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던 내게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은 이 교수님이 처음이었다. 나보고 창의적이고 천재적이라는 말하는 선생님 덕분에 행시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까.
그런 가시적 성과 외에도, 이 때의 대화는 20년 간 '창의성 부족'의 딱지를 안고 살아온 내게 힐링의 순간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창의성이 있다. 그 중에선 함양될 수 있는 창의성도 있다. 그건 아마 나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내가 감탄했던 내 동생들의 창의성은 모두 '자기다움'이었다. 때 묻지 않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아름다워 보였었다. 자신의 관점에 자신감을 갖는 일. 타인의 판단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 관점을 공유하는 일.
나는 내 동생들처럼
단번에 나의 날 것의 시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용기는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부끄러워 꽁꽁 숨기고 세상이 좋아하는 포장을 얹기에 바빴다.
그래도 난 인내력이 있고 습득을 잘하니까. 이렇게 꿋꿋이 쌓아가다보면 언젠가 남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벽에 벽돌 하나 얹는 가뿐한 마음으로, 나의 시선을 세상과 나누게 될 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