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에서 2주를 보냈다.
남편이 출장차 한 달 동안 입국을 하게 되어 나도 학회 발표, 친지 방문 등을 목적으로 잠시 방문을 한 것이다. 남편과 나는 우리 친정가족과 여행을 하면서 대망의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불멍'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던 파주의 에어비앤비였다. 다음 날 나의 친정가족과 남편이 인천공항으로 나를 데려다 주고, 남편은 서울에서 2주 간 더 머물며 한국에 소재한 직원들과 업무를 볼 예정이었다. 난 평화롭게 가족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남편은 방에서 미팅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나를 황급히 불렀다. 갑작스럽게 도쿄 출장이 잡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일정은 자유! 목적은 다음 프로젝트에 활용할 레퍼런스(일본의 거리, 조형물, 건물 등) 수집이고, 혼자 가는 출장이다. 자금 사정이 빤한 스타트업이다보니 식비 같은 것을 지원해주긴 어렵겠지만, 항공비와 숙박비 정도는 지원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동네의 작은 골목이나 지하철 역사 등을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남편에겐 더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나: 잘됐네! 도쿄 가보고 싶어했잖아. 이번 기회에 좋은 것 많이 보고와!
남편: 근데 난 당신이랑 가고 싶어. 혹시 시애틀행 비행기를 일본에서 출발하는 걸로 바꿀 수 없을까? 너무 비쌀까?
나: 그치만...음... 미국에 돌아가서 할 일이 많은데....
남편: 난 혼자라면 그냥 안가고 싶기도 하네... 아주 짧게 갖다오거나 하지 뭐.
나: 음.. 일단 표 한 번 확인해보자!
남편은 '혼자'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 한국 여행에서 나와 함께 순대국을 먹고 카페를 도는 데이트를 기대했던 남편은 내가 학회 준비, 가족(시댁/친정) 수발, 친구 맞이 등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며 잔뜩 아쉬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3박 4일의 친정가족과의 여행에서 바베큐 굽고 불멍을 준비하랴 고생을 많이 했던 터였다. 2주 간 시애틀-한국으로 떨어져 있는 것도 마뜩찮아 하던 차에, 도쿄에서 단둘이 몇 박 몇 일을 보낼 수 있다는 건 남편에게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밤 11시부터 우리는 불꽃 튀는 리서치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당장 내일 인천-시애틀 티켓을 6일 뒤 하네다-시애틀로 바꾸는 것이 클릭 한번으로 가능했다. 델타 항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대형 항공사라는 점이 이럴 땐 참 편하다. 변경비용은 360불. 아, 애매하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새로운 도시를 돌아보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낼 만한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좀 더 리서치를 해보기로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11월 셋째 주는 일본의 Labor Thanksgiving Day 주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쿄 중심지의 호텔은 1,000불을 호가했다. 익스피디아, 스카이스캐너, 에어프레미아, 구글, 네이버, 호텔스닷컴, 에어비앤비, 아고다 등등.... 세상에 어찌나 이런 중개업체들이 많은지. 찾아보니 이케부쿠로나 기요즈미 공원 주변, 그러니까 도쿄의 북서쪽과 동남쪽에는 100불대에서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김포-하네다는 비싸다.
당장 내일 김포에서 도쿄로 떠나는 표가 있을까? 남편은 하루 텀을 두고 서울에서 계획을 세운 후 일본으로 떠나고 싶어했지만, 나는 우리 짐이 워낙 많았기에(캐리어 5개 정도...), 서울에서 하루 자고 다시 공항으로 가는 것이 너무 지칠 것 같았다. 차라리 엄마가 공항으로 태워주었을 때 바로 도쿄로 떠나서 거기서 여행계획을 짜는 게 좋겠다 싶었다. 다행히 도쿄행 표는 아주 많았지만, 대개 인천-나리타 티켓(40만원 선)이었다. 김포-하네다는 티켓이 몇 장 있었지만 66만원 선이었다. 나리타 공항은 도쿄에서 2시간 정도 떨어져있지만 규모가 더 크고, 하네다 공항은 1시간 정도 거리라고 한다.
나는 인천-나리타 티켓을 끊고 돌아오는 날 각자 다른 공항을 가는 것이 어떨까 싶었지만, 남편은 우리가 짐이 많아서 나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된다며 구두쇠 근성을 극복하고 김포-하네다 티켓을 끊었다. 결국, 내 비행기 변경 비용 45만원과 내 도쿄 편도 비행기표 33만원. 총 78만원이나 추가 비용을 내고 우리는 다음날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여행책자를 찾아라!
남편은 어디에 여행을 가든 종이로 된 여행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에어팟과 애플워치를 쓰며 나보다 훨씬 디지털한 삶을 사는 그가 여행정보 만큼은 종이책을 고수하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꼭 '한국어로 된' 종이책자를 보길 원한다. 한국 사람들의 입맛이 훨씬 까다롭기에 더 믿을만하고, 지하철 정보 등이 보기 좋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여행을 갈 때는 한국에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책을 사왔다가, 남편이 원하는 브랜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결국 직구를 하기도 했었다(...)
이번에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남편은 과연 여행책을 찾을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나는 호언장담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데... 인천공항에도 책을 파는 상점이 몇 개나 있는걸. 분명히 여행책을 벽 한 칸에 빼곡이 꽂아 놓은 상점이 있을거야.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우린 일단 무거운 캐리어 하나를 러기지 보관센터에 맡겼다. 5박 6일 5만원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비용에! 혹시 김포공항 갈 일이 있으면 지하철 역사에 있는 짐 보관센터(일 단위가 아니라 4시간 단위로 요금을 받아서 더 비싸다) 말고 김포공항 내의 짐 보관센터를 이용하도록 하자. 짐을 맡긴 후 김포공항 국내선 터미널과 국제선 터미널 양측을 뒤졌으나 서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날에 '공항서점'이 있었지만 문을 닫았다고 한다.
결국 다소 비행시간이 타이트했지만 오전 10시반까지 기다려서 롯데 백화점 내에 있는 영풍문고에서 원하던 책을 구입했다.
책 사러 뛰어갔다온 남편
이 여행책은 내내 효자 역할을 했다. 스페인 여행에서도 그렇고. 한국어 책만 있으면 열심히 읽고 또 읽는 남편 덕에. 나는 살짝 쉬엄 쉬엄 따라다녀도 된다.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2박 3일 뉴욕 출장 등 급하게 출장을 가는 일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이렇게 일정 하나도 없이 숙박만 예약하고 대책 없이 가는 자유여행은 또 처음이었다. 매일 매일 각개전투하듯이 다니다보니, 남편과 투닥투닥거리는 일도 발생했지만 우리 둘다 도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남편은 이런 말들을 남겼다.
도쿄에 와보지도 않고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불렀던 것이 부끄럽군.
20대에 게임할 시간에 일본에 몇 달 머무를 것을... 그러면 더 좋은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을텐데.
여기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자라니까.... 아... 신카이 마코토가 만들어낸 하늘이 아니라 도쿄의 하늘이, 빌딩에 반사되는 빛이 원래 이런 거였어! 그 사람들은 그냥 있는 걸 그린 거였어!!
남편은 보도블럭의 장애인 배려에, 주변의 자연물과 어울리게 디자인한 안전 표지등 같은 것에 감동했다. 나는 아티스트가 직업이 아니기에 남편만큼 섬세하게 관찰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도쿄에서 느꼈던 감상을 연재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