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반격 제1탄
땅따랑당 땅따랑당따 땅따랑당 땅따랑당따-
"여보세요. 아이구 xx야~~~"
화색이 도는 아버님의 목소리.
아버님과 나는 가끔씩 통화를 했었다. 남편과 아버님은 10분 정도 통화하면 다행이라는데, 나와 통화를 하실 땐 어찌나 재미있게 말을 이어나가시는지 한두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아버님은 평생 이동통신사에서 근무하셨다. 젊을 때는 통신장으로 배를 타셨다고 한다. 3살박이 첫아들(남편)이 가지 말라고 붙잡자, 돈벌이가 좋던 뱃일을 그만두고 전파직 공무원으로 취직했다가 보다 벌이가 나은 한국이동통신으로 이직을 하셨다고. 아버님은 기술직군에서 성과급이 잘 나오는 마케팅 직군으로 옮기셨고, 드물게 정년퇴직을 하신 몇 안되는 인물이 되셨다. 나도 공직생활을 하며 통신사 분들과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기에, 아버님과 나는 서로의 일을 잘 이해하는 편이었다. 특히 노조 활동시절 말씀을 하실 때, 통신사 업무 외에 부업으로 큰 돈을 버셨던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아버님과 이야기하면, 남편을 통해 파편적으로 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집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초등학생 시절 유럽 여행을 여러 차례 간 것이 의아했었다. 후에 아버님과 이야기하다 그 여행이 모두 노조 단체가입 상품 덕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님은 큰 그림을 보면서 상황을 본인(의 가족)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데에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계신다. 쉽게 말해 생활력이 강하고 순발력이 좋은 타입이다. 은퇴하신 지금도 직장 보험과 지역 보험을 넘나들며 여러가지 방법으로 절세를 하고, 각종 채권과 금융상품에 활발히 투자를 하고 계신다. 이동통신사의 자녀 대학원 지원금을 최대로 받았다는 사실, 드물게 국내 대학 학비와 해외 유학비까지 받아 낸 케이스라는 사실 등. 이렇게 아버님이 자랑스러워 하시는 일화들은 아버님이 두뇌를 최대치로 발휘해 우리 남편을 곱게 곱게 길러 낸 역사이기에, 나로서는 들어드리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 날도 아버님과 나는 30분 정도 사소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 아버님, 어제 xx(남편)에게 전화하셨죠.
아버님: 응.
나: 무슨 말씀 하셨어요?
아버님: 뭐, 그냥 사는 얘기했지.
나: 혹시 연봉이 얼마인지 물어보셨어요?
아버님: 응. xx집 아들은 구글에서 xx억을 받는다더라고. 솔직히 걔 연봉으로는 너희 생활이 어렵지 않니?
나: 아니에요, 아버님. 저희 생활 여유로워요. 저축도 잘 하고 있어요.
아버님: 그래도 집 사고 하려면 그렇게 빠듯해서야 원. 걔가 투자 계획은 잘 갖고 있느냔 말이야. 그냥 무턱대고 저축만 하고 있잖니?
나: 맞아요. 투자 계획이 저희가 별로 없긴 해요.
아버님: 라떼는 말이야. 처음에 전세를 가서 규모 있게 저축을 해서 부수입을 만들고 ... (어쩌고 저쩌고) 하여튼 xx 그 놈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어. 걔는 어떻게 돈을 모아서 가정을 꾸릴까 생각이 없다고.
나: 아버님. xx만큼 소비 계획적으로 하고 저축 많이 하는 사람, 제 주변에 없어요. 저희도 집 사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기는 해요. xx가 그간 해 놓은 저축으로 충분히 집 살 수 있어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돼요.
아버님: 있는 돈을 다 부동산에 넣는 게 그게 좋은 게 아니란 말이야. 걔 동생이랑 비교해봐도, 동생은 연봉도 더 되고, 투자에 머리도 아주 밝아.
나: 네, 아버님. 도련님이 훨씬 경제에 밝긴 하죠. 그렇지만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면 저희 남편이 무슨 기분을 느낄지 생각해보셨어요?
아버님: 정신 차리겠지, 지가.
나: 아버님. '아, 내가 정신을 차려서 투자 계획을 세워봐야겠다.'라는 마음을 먹는 게 아니라 지금 금년 들어서 가장 의기소침해있어요. '아빠는 역시 내 연봉밖에 관심이 없구나.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한다구요.
아버님: 지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지!!!!!
나: 아버님이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하셔도, xx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아버님께서 그렇게 호통을 한 번 치시고 나면 xx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아요. 아버님께서 투자하는 법을 상세히 알려주시면 어떨까요?
아버님: 내가 미국 투자는 알 수가 없지. 지가 한국에 투자하면 좀 알려주겠지. '애플'이랑 '나이키' 사라는 이야기는 내가 했다.
나: 아버님.. 제가 부탁드릴게요. xx는 여리고 예민한 성격인 거 아시잖아요. 아버님에게 혼나고 나면 비생산적인 결과가 훨씬 크고, xx가 마음이 아프면 저도 마음이 아파요. 아버님, 제 생각해서라도 xx를 '정신 빠진 아들'이 아니라 '한 가정의 가장'으로 생각하고 존중해주세요. 저도 어제오늘 마음이 안 좋아서 공부에 집중을 못했어요.
아버님: .... 내가 며느리한테 이렇게 혼이 나는구나.
나: 아버님,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버님: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조심하마.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알렸다. 남편은 처음에 아연실색했고 기분나빠했다. 도대체 자기 이야기를 왜 아빠에게 했느냐, 그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아빠가 기분 나빠서 더 뭐라고 하면 어떡하냐, 그냥 아빠가 나에 대해 아는 게 싫다, 생각하는 게 싫다, 등등등.
그리고 나서 몇 시간 후, 처음에는 속상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부인이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시아버지에게 맞서는 것이 뭐 나쁠게 있냐면서.
나를 지켜주는 부인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고 좋다고 했다.
남편의 복잡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버님에게는 침착한 듯 말을 했지만,
아버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힘은 분노였다.
하루에도 15시간씩 일하는 남편에게 상처를 주는 핀잔이 웬 말이란 말인가.
아버님은 아버님의 방식대로 사랑을 주고 계심을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남편에게 채권을 증여해주셨고 남편이 모를까봐 세금을 내는 법을 상세히 알려주고 계신다.
남편 미대 유학을 그렇게 반대하셨지만,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차를 사라고 만 불을 더 보내셨다고 한다.
그 덕에 남편은 오롯이 학위 과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도 미국에 오실 때마다 1만 불을 현금으로 꼭 챙겨오시고, 기회만 되면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주고 싶어하신다.
언젠가 남편이 아버님의 핀잔을 그리워할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지금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과 사랑이라고 나는 믿었고.
아버님도 어느 정도 큰 방향성에서 동참해주시기를 바랐다.
아버님이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
남편이 아버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
부자지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보일듯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싶어, 무력하고 허망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나는 남편의 편이라, 언젠가는 아버님이 남편이 원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는 분이 되어 주시길 오늘도 희망하고 있다.
남편은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며
기대를 거두라고 하지만...
믿어요, 아버님!
그렇게 아버님과의 문제를 대강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보았던 변호사 시험에서는, 예상대로 고배를 마셨다. 최소 266점을 받아야 했는데 결과는 256점. 10점이나 부족한 점수라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다시 변호사시험을 칠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박사과정에서 배울 게 엄청나게 많아진 덕에(언젠가 이야기할 기회가 되면 좋겠지만, 로스쿨에서 컴퓨터사이언스쪽으로 훨씬 가까워지게 되었다) 요즘엔 굳이 자격증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자격요건도 채웠으니, 언젠가 먼 훗날 시험공부를 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