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일 거라곤 전혀 생각을 몰랐다. 머릿 속에서 오랫 동안 그린 그림은, 세이클럽 비공개 캐릭터처럼 이불을 뒤집어 쓰고 히키코모리 같은 이상한 사람.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이코 범죄자인 줄 알았다.
정원: ..........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형사: 아는 사람이라서 놀랐어요?
정원: 네.
형사: 이런 사건, 보통 다 아는 사람이에요.
정원: 아....진짜요?
형사: 네. 모르는 사람이면 진짜 범죄고, 심각한 건데. 아는 사람이면... 그것도 잘못 될 순 있지만. 좀.. 하여튼 그래요. 제가 전화하자마자 바로 자백해서, 경찰서 오지도 않고 전화로 다 자백해버려서 뭐 조사할 것도 없었네요. 일단 경찰서에 며칠 후에 출석은 할 거에요.
정원: 영수증이나, 싸이월드 메시지나, 이런 것도 자백했어요?
형사: 그건 경찰서 와서 이야기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있는 자백만으로도 고소장 접수하기에는 충분해요.
정원: 네..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사님.
형사: 네. 이제 잠 좀 푹 주무실 수 있겠네요. 힘내시고요. 진행상황 알려드릴게요.
김철종은 BMW인가 외국 자동차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영업직인데 연봉이 높다면서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그는 정원을 처음 보았을 때 연애상대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나이가 10살인가 많았어서 정원은 그다지 생각이 없었다. 정원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도 더 질척거리진 않았다.
훤칠하고, 결혼할 여자를 간절히 찾고 있는 듯 했다. 강남 어딘가에 살고. 압구정에서 나고 자랐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 강남 내에서도 더 잘 사는 강남과 못사는 강남을 구분하던.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그래도 왠지 알아서 좋은 짝 찾아, 좋은 집에서 아기 낳고 골프치면서 잘 살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뚜르르르.
전화가 왔다.
김철종이었다.
범인을 잡았는데 마음은 더 불편하다
받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손이 떨렸다. 형사 아저씨한테 전화하고 받아야 되나? 어떡하지?
전화가 계속 울리고, 부재중 전화가 5통 왔다. 한 번 더 울려서 받았다.
그래. 무슨 말 하는지 들어나보자.
정원: 여보세요.
철종: 아, 정원아.
정원: 네.
철종: 나 좀 살려줘.
정원: 네?
철종: 진짜 미안하다.
정원: 왜... 그랬어요?
철종: 미안해.. 내가 회사에서 요즘 스트레스도 너무 많이 받고... 예전에 너랑 잘해보고 싶었는데.. 알잖아.
정원: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저한테 성기 노출을 해요?
철종: 아...그 날은 술 마셔서....
정원: 제가 경찰에 신고 안했으면 언제까지 할 거 였어요? 네? 재밌었어요?
철종: 내가 진짜 죽을 죄를 지었다. 진짜 제발...
정원: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으세요.
철종: 아.. 진짜 그러지 말고.... 이거.. 성폭력특별법으로 수사 받게 되는 거야. 형 확정되면 회사에 고지가 간대. 그러면 나 짤릴 수도 있고.. 지금도 세일즈 안좋고 해서 위태로운데... 내가 평생에 걸쳐서 사죄할 테니까 제발.. 고소 취하해주면 안될까? 무릎 꿇고 빌고 뭐든 다 할게.
정원: 그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렇게 못하겠어요. 평생에 걸쳐서 사죄 한다는 것도 징그럽네요.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철종: 정ㅇ....
전화를 끊었다. 전화와 문자가 빗발쳤다. 다음 날 오전, 형사에게 사실을 알렸다.
형사: 네? 정원씨한테 연락을 했다고요?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진짜 나쁜 놈이네. 계속 연락 오면 제가 다른 혐의도 적용할 수 있으니까, 꼭 알려주세요. 단단히 이야기할게요.
하지만, 철종의 전화는 계속 되었다. 문자도 하루에 10통이 넘게 왔다. 경찰 아저씨에게 이르고 나면, 하루 이틀 뜸하다가 이내 다시 시작되었다. 경찰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추가 혐의라는 것도 별 게 아니었나보다. 지금생각하면 접근 금지 명령 같은 걸 신청했겠지만, 그 때만해도 법을 잘 몰랐다.
'정원아. 미안하다.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고. 죄 지었으니 벌 받아야 하는 거 맞는데. 내 인생이 지금 너무 팍팍해서 조금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한 번만 용서해주라.'
'연락 좀 받아. 제발. 나 정말 이러다 죽을 것 같다.'
'나 죽는 꼴 보고 싶니? 제발 전화 받아라.'
여러 가지 기법으로 협박을 했다.
죽겠다,
내가 너한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자살하고 싶다,
직장 잃으면 나 정말 죽는다.
2주 째 계속되는 문자 공격. SK에 연락을 해서 차단을 해도, 다른 친구 번호로 왔다. 심지어 갤러리에서 함께 일했던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언니는 자기는 정원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 잘못한 사람은 벌 받아야 하는 거라고 하면서도, 본인이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응..?) 또 워낙 남자친구의 친한 친구이니, 남자친구가 걱정을 많이 한다며, 자기를 봐서라도 좋게 잘 봐줄 수는 혹시 없겠는지 물어보려고 연락했다고 했다. 본성은 착한 사람인 거, 너도 잘 알지 않냐고 했다.
'이 언니랑도 끝이구나.'
정원은 생각했다.
본능은 고소를 취하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사기록이 남게 되면 정말 아무 곳에도 취업을 못하게 되려나..? 성범죄자로 낙인이 찍히나..? 나를 만지거나 한 것도 아닌데, 스토킹 만으로 그렇게까지 사람 인생을 망치는 건 너무한가..? 앞으로 또 그러면 어떻게 하지? 저렇게 사죄하면 앞으로 안 그러려나..? 그냥 용서해주는 게 문자공격 안받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