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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두 아줌마 Jan 08. 2021

사랑 때문에 안 보인다고?
못 본다고?

The power of love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봤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스포츠 에이전트가 우연한 사건으로 모든 걸 잃게 되지만 새로운 친구와 연인을 만난 후 역경을 딛고 새 삶을 시작한다는, 할리우드 영화 성공 공식에 딱 부합하는 스토리를 가진 영화다.   

마지막 부분에서, 평범한 외모에 가난한 데다 아이까지 딸린 이혼녀 르네 젤위거에게 탐 크루즈가 목소리를 쫘-악 깔고 이렇게 속삭인다. 

"You complete me. 당신은 날 완성시켜요. (그러니, 날~ 떠~나~지~ 마~ by JYP)"

이런 고백에 어떤 여자가 버틸 수 있을까. 둘은 두 팔 벌리고 서로를 꽈악 안아준다. 주위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박수, 박수~ 짝짝짝.      


여기서 질문 하나. 과연 두 사람 눈에 시끄럽게 환호해주는 주위 사람들이 보였을까? 아닐 거다. 그의 눈은 그녀만, 그녀의 눈은 그만 담고 있었을 거다 . 나머지는 다 표백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하얗게 지워진다. 그런 게 ‘사랑’이다.      


지난여름 늦은 밤, 광역버스에 올라타니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더위에 지쳐 비틀비틀 자리를 찾아 앉고는 머리 위 에어컨 조절기를 활짝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지는 성수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왔다. 냉기에 적응이 될 즈음, 희미하게 어딘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 좌석 젊은 남녀가 꼭 붙어 앉아 서로에게 뭔가를 얘기하며 큭큭 대고 있었다.     


좋을 때네.

부러움 반 시샘 반 마음으로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경한 어떤 것이 내 눈에 들어왔고, 그게 무언지 알아챈 순간 내 시선은 그대로 쨍 하고 얼어버렸다. 브라질 아마존 숲에서 잔뜩 배불리 먹고는 한국에 원정이라도 나온 듯한, 모기 비스름하게 생긴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앞 좌석 유리창에 떠억 허니 붙어있었다. 어찌나 큰지, 실처럼 길고 가느다란 대여섯 개 다리가 버스 움직임 따라 쿨렁쿨렁 움직이는 게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뎅기열,’ ‘말라리아’ 같은 단어가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다.      


뎅기열과 말라리아는 대표적인 열대병으로 보통 고열과 통증을 동반하는데, 특히 뎅기열은 ‘Break bone fever’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통증을 유발한단다. 우리나라도 이제 따뜻해져서 말라리아가 간간이 발생하는데 제주도에서 2013년에 뎅기열 매개체인 흰줄숲모기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니, 이게 혹시 그들 중 하나인가 싶은 거다. 동시에, 저렇게 큰 게 모기일 리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솟구쳤다. 어쨌든 생전 처음 보는 자이언트 곤충 앞에서 난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느꼈고 눈을 앞 좌석 창문에 딱 고정시킨 채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이봐요, 조심해요.

라고 앞 좌석 커플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데, 이게 모기인지 아닌지 확신도 없는 데다 공포로 입이 완전히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희한하게도, 앞 좌석 커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안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살짝만 눈 돌리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에 범상찮은 곤충이 흔들흔들 앉아 있는데도, 그들 눈은 그저 서로만을 바라보기 바빠 보였다. 톰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가 그랬던 것처럼. 하기야 사랑에 빠지면 그렇다. 나도 그랬다.


아무리 예쁜 풍광도, 무시무시한 배경도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어버리고 상대의 모습만 점점 또렷하게 다가온다. 상대와 함께 마시면 목으로 넘어가는 건 모두 늙지 않는 불멸을 가져다준다는 신들의 암브로시아가 되고, 상대와 함께 걸으면 남루한 판자촌도 신들의 궁전 올림포스가 된다. 그가, 혹은 그녀만이 내 전부가 되고 세계가 된다. 우주가 된다.      


톰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도 영화 속에서 행복했으니 그 커플도 그랬으면 좋겠다. 

서로의 눈이 호수인지 바다인지 모르겠다던 그 마음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명작동화의 마무리는 언제나 우리 모두의 꿈이고 희망이니까.      


그 후 백설 공주와 왕자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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