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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두 아줌마 Jan 15. 2021

무의식이 숨겨둔 보물상자

'미워한다는 것'의 또다른 의미


온수 매트 보일러 소리가 너무 커서 잠에서 깼다. 연식이 오래되어 이제 고이 보내드려야 할 시기인데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 보다 (가지 마. 시려(싫어)~ 시려(싫어)~). 낮에 들어보면 귀에 아주 조금 거슬릴 정도인데 한밤중 자다 깨면 망치 소리와 매한가지이다. 밤이 조용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가 더 문제라고 느꼈다 (남편은 잘만 자니까). 5살짜리 꼬마가 밥에서 콩만 골라내듯, 그 소리만을 뽑아내 100% 순도로 정제한 다음 지하철 소리만큼 크게 증폭시켜 듣는 거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 있는가? 

미워한다는 건 사랑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출력한다. 주위가 불투명 유리를 끼운 듯 흐릿해지고 오직 그 사람만 보이고 들리고 생각하게 된다. 헐크가 분노를 매개로 몸집을 부풀리듯, 그/그녀의 모습이 비대해지다가 급기야는 내 속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더라.      


보통은 내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밉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에게 딱히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도 미워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무의식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았다. 문제가 있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나’라는 걸. 내 마음속 ‘상처’라는 걸.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A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안면근육이 뻣뻣해지고 뇌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1000년 눌렸던 용암 터져 나오듯 솟구치는 걸 느꼈다. A를 마지막으로 본 게 1년 전이었는데, 그 이름 석 자를 듣는 것만으로 온몸이 미움으로 화르륵 달아올랐다. 마치 지금 A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처음 A를 향한 감정을 인식했을 때 나는 당혹감을 느꼈었다. 미워할 특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뭔지 모를,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에 내가 먼저 다가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움’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있으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아냐, 바보야.


그러다 김형경 작가님의 책 <소중한 경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함께 모여앉은 사람들 속에 엄마 같은 사람도 있고 아빠 같은 사람도 있다. 형제자매에 대한 감정들도 고스란히 경험된다. 아, 이 모임에 내 온 가족이 다 있구나 알아차리게 되면 무의식에 고루 닿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독립적인 편이었고 내 가족 중 하나는 그렇지 않아서 내가 늘 그녀를 돌봐주는 형편이었는데, 우연히 만난 A가 내 가족과 비슷해 보였던 모양이다. 스스로를 챙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은 연약한 흔들림을 난 A에게서 감지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 가족의 모습을 A에게 투영시키고 있었던 걸까?   

   

가족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아프면서도 그립다. 날 버린 첫사랑이 지긋지긋하면서도 때로는 아스라이 보고 싶은 것처럼...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내 가족에게 난 엄청 화가 났었는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늘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에는 A가 그리웠고 그다음에는 왠지 불편했다.      


날 그렇게 아프게 했는데도 내 마음은 그 가족이 그리웠던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안쓰러웠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다 놓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던 내 마음이 너무도 비이성적으로 느껴져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A를 향한 무의미한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참 어이없고 몰지각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이 의미 없는 감정 소모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A와 내 가족은 다른 사람이야, 라는 내적 선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미 두 존재를 하나로 합체시킨 내 무의식은 부모 말에 자기 귀 틀어막는 중학생처럼 의식의 조언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다.     


내게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책에 마음 가는 대로 끄적이는 거다. 의식 속에서 떠돌던 생각들이 시각화되고 선명해지면서 어느 순간 무의식으로 향하는 계단용 철문이 삐걱하고 조금 열리는 것 같다. 이번에 이리저리 끄적이다 내가 찾은 방법은 내 가족과 A의 '서로 다른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거였다.     


A는 이렇고 내 가족은 저렇고.

A는 요렇게 행동하고 내 가족은 조렇게 행동하고.

A는 이걸 좋아하고 내 가족은 저걸 좋아하고, 등등등. 


둘의 차이점들을 써 내려가며 시각화시키자 어느 순간 무의식이 움찔하며 약간 동하는 걸 느꼈다. 그때를 놓칠세라 무의식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그래,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야. 그러니 이제 A를 무의미하게 미워하는 거, 그만두렴."     

내 마음속 영혼이 희미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무의식을 성장시키려면 자꾸만 말을 걸어줘야 한다. 

어디가 불편한지, 왜 그런지 물어보고 같이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무의식은 자꾸 숨어 다녀서 어떤 때는 찾기 힘들다. 실어증에라도 걸렸는지 대답도 잘 하지 않는다. 미운 7살 꼬마처럼 잘 수긍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을 걸다가 승질이 나기도 하는데, 그래도 그 어르고 달래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 녀석이 보물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황금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 뭔가가 잔뜩 들어 있는데, 녀석을 잘 구슬리면 하나씩 꺼내어 내게 내어준다.      


바로 ‘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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