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긴장감.
눈물이 차올라 이미 망막 밖으로 새어 나왔는데도 울지 않으려 이빨을 꽈악 앙다문다.
그러나 그렇게 이빨이 으스러질 정도로 애써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눈물보다 더한 피가 스며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긁히고 찢겨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임시방편으로 여기저기 기워보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그는 이미 내부의 압력을 못 이기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지경이다.
그가 꿈꾸던 핑크빛 미래는 이미 조각나 흐릿해졌고
차갑게 칠해진 현실은 싸늘하고 암울하다.
누군가에게 난도질당한 듯 내면은 너덜거리는데 그에 비해 왼쪽 눈은 아주 멀쩡해 보인다.
소리를 낼 수 없는 가슴속 울부짖음은 그래서 더 슬프고 처절하다.
바스키아가 평소 관심 있게 바라봤다는, 핍박받던 흑인의 모습일까?
아니면 예술가로서의 고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지 모르는 우울의 증거?
아니면, 셋 다? 알 수 없는 일이다.
21살이 보여주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분노와 절망, 비참함과 참혹함이다.
원하던 대로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가졌지만, 결국 마약에 취해 27살 어린 나이에 고독하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그의 미래를 예견한 작품 같기도 하다. 어쩌면 해부학을 좋아했던 그가 아주 예리한 칼로 인체를 자르고 불필요한 살을 도려내 펼쳐 놓은,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돈이 될 거라는 걸 간파한 큐레이터와 컬랙터들이 일주일에 9,10개의 그림을 그려내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본주의 욕망의 독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결국 스스로를 망가뜨렸던 그가 정말 많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백인 주류 사회의 정점을 찍었을 때 그는 그 속에서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니, 친구이자 아버지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앤디 워홀이 숨을 거둔 후 더이상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문득, 영화 <그린북>에 등장하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의 절규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백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칭송받는 동시에 차별받으며 홀로 견뎌야했던 흑인의 정체성 고민이 날것 그대로 그 안에 녹아있었다.
So if I'm not ‘black’ enough and if I'm not ‘white’ enough, then tell me, Tony, what am I?
바스키아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오늘 내게도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