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보고 내가 느끼는 것들

by Seb

이것이 제대로 된 감상법일지는 모르겠지만 먼 과거에 그려진 그림이나 음악을 감상할 때 나는 애틋함을 느낀다. 아무리 환희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어도 자꾸만 애틋함을 느껴 하나의 습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감상에 있어서의 이러한 습관은 대학생 시절 마지막으로 들었던 교양 수업의 첫 시간 이후로 생겨난 것이다. 당시 교양 수업은 고전 음악의 이해라는 이름으로, 여러 클래식 음악을 듣고 음악의 역사를 간략하게 배우는 수업이었다. 본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잘 모르고 감상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참으로 지루하기만 했는데, 그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첫 수업이 1시간 정도 이어지자 교실의 절반 정도는 본인의 개인 과제를 하거나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졸음과 현실의 세계를 왕복하고 있었다.


그 지루했던 시간의 마지막 곡은 클로드 드비쉬의 <바다>였으며 교수님은 드뷔시가 일본의 '우키요에'라는 판화 기법의 바다 그림을 보고 느낀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으로 만든 곡이라 설명해주셨다. 이 설명을 듣고 내가 떠오른 것은 '인스타그램'이었다. 무언가를 보고 떠오른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마치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좋아요를 남기는 마음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 작품은 결국 창작자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고전 음악에서 애틋한 마음을 만들어냈다.


지금이야 흔적을 남기고 감상을 남기는 것이 너무나 쉽지만 교육 환경이 지금보다 좋지 않고 시급한 문제들이 더 많았을 과거엔 분명 훨씬 더 어려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결국 그러한 어려움을 뚫고 자신의 생각, 가치관 그리고 감정을 작품의 형태로 남긴 것이다. 그렇게 기어이 남기고자 했던 마음들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참으로 애틋해진다.


누군가는 삶의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우주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한낱 먼지만도 못한 존재이기에 결국 모든 삶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론 이것이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백 년 전 누군가 남겨둔 마음에 의해 때론 구원이 생겨나고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 수백 년 후의 독자 혹은 청자가 위로를 느끼고 며칠을 더 살아갈 마음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은 여전히 영원하지 않지만 남겨진 것은 끈질기게 남아 누군가의 삶을 받쳐주는 쿠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과연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작품을 만들었던 그들이 이것까지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돈 때문에 만들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허영심에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것은 분명한 의미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사실이 무의미해 보이는 나의 삶이 어쩌면 언젠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만든다. 지금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도 미래의 나 혹은 소중한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오늘 하루 조금이라도 더 발버둥을 쳐볼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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