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은 국가의 품격이다
“아~피는 물보다 진하지! 대한민국 문학 만세”
작가 한강의 2024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 뉴스를 듣고 생각 나는 대로 튀어나온 저의 탄성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처럼, 심장이 뻐근하게 밤 깊도록 "대한민국 만세" 읊조렸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젊은 시절 개인의 노력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푸른색의 좌와 붉은색의 우를 제외하고는 이타적 진보와 겸손한 보수가 사라져 가는 이 나라가 싫어져 조국을 떠날 계획을 꽤 오래 진지하게 궁리한 시간도 있었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처럼 저도 사무치도록 Team Korea에 소속된 국민의 자부심으로 탄식을 연발했습니다. 설렘의 세로토닌에 심쿵의 도파민 변주곡이 실내악을 넘어 오케스트라로 쿵쾅거리고 빈센트 반고흐의 별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는 밤을 보냈지요. "아~ 난 어쩔 수 없어.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야. 어쩌지 못해~ 노벨문학상이 대한민국 것이라니.. "Oh My God! Thanks & Thanks 한강 작가님!"
며칠이 지난 오늘 여전히 감흥의 기운이 저의 핏줄을 타고 서핑하며 돌아다닙니다. 대한민국이 노벨문학상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제가 읽고 무척 좋아하는 강력한 수상 후보자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와 몽환적 이야기꾼 중국의 '찬쉐' 작가들을 예상외로 제치고 말입니다. 한강 축제에서 탄성을 질렀던 하늘의 불꽃보다 더 세고 오래가는 문학도의 기운이 높아가는 가을 하늘 속 구름을 타고 올라 침잠해 가던 늙수그레의 마음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날 변덕이 싹 사라진 청명한 가을 새벽에 글을 씁니다.
(사진=연합뉴스)
이 글을 읽는 혹자께서 "이 사람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 흥분할 정도면 제정신 아니구먼.."이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대학교 초년 시절 전공 수업에 관심 없이 학교 신문사 기자로 들락 거들며 오로지 문예지나 백일장에 글을 올리고 작가 최인호를 만나러 갈 기회를 엿보며 학교 앞 막걸리 가게에서 학보사 동기들과 외상 술 마시며 끙끙대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나 열정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독서량과 골방에 틀어 박혀 담배꽁초 비벼 가며 글쓰기엔 탐험할 세계가 너무 넓었고 부모님이 물려준 부채를 내 인생에서 밀어내야 한다는 과업을 인사불성 술에 취해도 멀쩡하게 알았지요.
문학하는 친구들과 결별하고 군에 입대하며 문학은 남의 동네 이야기가 되었지만 배운 도둑질은 어쩔 수 없었는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뉴스에 발표되면 퇴근길 광화문 교보문고로 슬며시 찾아가 책 냄새를 맡아 가며 마음의 허기를 달래곤 했지요. 맞아요~ 허기! 젊은 날 면도날처럼 시퍼런 감각의 허기를 채워주고 잠자던 내 열정을 불러낸 노벨 문학상! 아~ 내 생전에는 볼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노벨문학상이 한글로 쓴 한국인 작가에게 주어지다니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로또인지 말입니다.
경쟁력의 무대에서 생존해야 하는 무서운 글로벌 경쟁에서 대한민국 법인의 CEO로 20년 세월을 겪었습니다. 냉정하고 객관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통계와 감정 없는 분석적 태도로 세계 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시간을 보낸 저에겐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세계 사장단 모임에 가면 Great Global Korea (위대한 대한민국)라고 자부하기엔 솔직히 뭔가 좀 찜찜한 구석이 늘 있었지만 이제부터 한글로 쓴 글이 글로벌에서 통용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깨 활짝 펴고 콧대를 조금 더 높여 호기를 부리듯 해외출장길에 오를 겁니다.
동경하던 문학을 포기하고 사업으로 대한민국에 법인세를 더 많이 내기 위해 발톱 무좀으로 고생하며 불꽃처럼 일 할 때, 대한민국 문학은 노벨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었으니까요. 이젠 무거운 마음의 짐 내려놓고 애쓰지 말되 즐겁게 일하고 읽고 쓰고 싶을 뿐입니다. 이 마당에 뭘 더 바라기나 할까요? 대한민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는데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50년 전에 비해 1인당 소득이 60배가 성장하도록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세계 12위 클래스에 진입한 나름 부자 국가가 되었지만,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GDP (Gross Domestic Product; 국내 총생산) 비중이 여전히 2% 를 밑도는 사실 때문에 글로벌 주요 국가 사장단 Top10 포럼에 가면 한국시장 관련한 주요 투자정책을 직접 이끌어 내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서양의 콧대 높은 주주들 앞에서 자존심에 손상을 감수하고 대한민국에 공장 투자 유치와 그 미래가치를 제안했을 때 우리나라의 비싼 인건비와 원가, 낮은 생산성 때문에 투자 안이 거절당하고 다른 나라로 투자가 결정 되었을 때 분한 마음에 씩씩 거리며 입술 깨물고 부글부글 끓는 언짢음으로 비행기 창 밖을 노려 보며 귀국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스웨덴 현지 동료로부터, 노벨 문학상을 한국인 작가가 수상 한다는 뉴스를 들었다며, 가장 잘 아는 한국인 친구가 떠올랐다며 "Congratulations Korea" 축하의 SNS 톡을 보내왔지요. 이 메시지를 받자마자 "Thanks to Nobel Prize Foundation~ Proud of being Korean” 답글의 스웨덴의 친구에게 보냈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불러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이유는, 거두절미하고 한강 작가의 수상이 가져다 줄 경제적, 언어 통계적, 인문학적 가치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지금부터 한국 문학은 현대 경영학의 구루(Guru)인 마이클 포터 (Michael Porter)가 창안한 '경쟁력 (Competitiveness)'을 획득하여 세계인이 읽는 한국문학이 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은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 독자의 시각에서 보면 노벨 문학상을 탄 대한민국의 작품을 읽어야 할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경영인의 시각으로 보면 노벨문학상은 5천만 명 한국인 대상으로 한글로 쓴 작품이지만 그 160배가 넘는 전 세계 81억 인구에게 번역하여 읽을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독자층과 팬덤이 두터워져서 기쁠 것이고, 출판업 이해 관계자들에게는 시장규모가 그만큼 확대되기 때문이지요.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주옥같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많으니까 문학을 사랑하는 외국어 번역자들의 일거리가 소홀치 않게 늘어나니까 말입니다. 실례로 제가 글을 써 올리는 브런치 작가 사이트에는 날이 갈수록 젊고 깊고 제 마음을 홀리는 우리나라 미래 작가들의 작품들이 마치 깔끔한 대형 갤러리에서처럼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이 알려진 다음날 우리나라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출판업 회사들의 주가는 상종가에 가까이 급등했고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일본 중국 등 문학 선진국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현지 언어로 번역 출판 한다는 결정이 이미 달라진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한강 작가와 유망한 국내 작가들의 소설 작품들을 연극이나 영화로 제작할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 갑니다.
둘째, 한글을 배우고 한글 작품을 직접 읽는 외국인 추세가 지난 수십 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우상향 속도처럼 가속화할 것입니다. 재외동포재단이 파악한 올해 2월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116개 국가에서 약 2,000의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 수도 약 1만 5천 명을 초과한 것으로 집계되었답니다. 대륙별로 보면 미국과 캐나다 두 나라에만 전체가 절반이 넘게 편중된 것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에서 한글을 배우고 가르칠 학교가 늘어날 것이라 예상합니다. 외국인이 한글을 배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한국문학을 접하게 될 것이고 그 중에서 한국문학 번역과 출판에 종사할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 되겠지요. 한국문학에 대한, 수요 측면에서 본, 독자의 증가는 노벨문학상이 가져다 주는 한국문학 지속성장을 견인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번 올림픽이 열리게 될 3-4년 안에 한글학교와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 그리고 한국의 문학작품이 몇 십 배 증가할 것이라 믿습니다. 단, 얼마나 어떻게 증가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관심사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지요.
셋째, 바쁘다는 이유로 독서하지 않는 성인들이 책에 관심을 가질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약 4명만이 1년 간 책을 한 권 이상 읽습니다. 거꾸로,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6명은 전자책 포함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습니다. 성인 연간 종합독서율은 1994년까지만 하더라도 86.8%에 달했지만 전자책이 통계에 포함된 2013년 이후 매번 최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출처 : 신아일보(http://www.shinailbo.co.kr), 2024.04.18 기사). 거꾸로 보면 책을 읽지 않는 10명 중 6명의 성인이 책을 읽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벌떡 일어나 한강 작가의 30년 전 첫 단편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먼지 수북한 책장 가장자리에서 찾아내어 밤을 꼴딱 새워 읽을 요량으로 더블 샷 커피를 진하게 우려냅니다. 그리고 서재에 앉아 한 장 작가의 독자가 되어 글을 씁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 것이다.."
30년이 흘러 최근의 인터뷰(매일경제신문 2024.10.11)에서 그녀는 말을 했지요.
Q. (작가에게 소설의 의미란?)
생각하고 서성이고 고민하고 질문하고 길을 잃고 우회하고 되돌아오고…. 그런 일이 소설을 쓰는 일이라고 지금도 느낍니다. 그렇게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요.
Q. (문학이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읽히는 의미란?)
문학이라는 것이 원래 연결의 힘을 가지고 있지요. 언어는 우리를 잇는 실 이기도 하고요. 어디에든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 독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Q. (100년 뒤에 작가의 글이 후대에 어떻게 읽혀 질까?)
100년 뒤에 제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인류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예측하기 어렵고요. 그 프로젝트에 참가한 후로 미래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겼습니다. 인간은 변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어떤 본질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변하지 않은 마음들이 그 시공간에 있어서 제 글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Q. (작가에게 소설의 역할이란?)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말 깊은 진실을 보거나 보여주기 쉽지 않잖아요.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나는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있어’ 라고 고백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꺼내기 쉽지 않지만 표면 아래에서 우리를 흔드는 중요한 감정들, 깊은 의문들, 감각들을 문학이 다루면, 그걸 읽는 사람들은 문득 자신 안에 있던 그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읽고 있는 소설 속 사람이 되어보며 자신으로부터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을 반복하면 자아에 틈이 벌어지면서 투명하게 자신을 직시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렇게 소설은 여분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를 연결하는 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집필할 때의 정신적 풍경에 대한 질문)
심장 속, 아주 작은 불꽃이 타고 있는 곳. 전류와 비슷한 생명의 감각이 솟아나는 곳.
한강 작가가 심장 속 불꽃을 태운 생명의 감각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가난한 고독으로 고립되어 있다가 만나고, 부딪히고, 버리고, 방황하다가 추락하면서 상처받고 깨진 존재들의 고단한 삶이 어떻게 버티고, 꿈꾸고, 저마다 홀로 시련을 감당해 내는지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아주 밝은 것, 밝고 눈부시고, 아무리 더럽히려 해도 더럽혀지지 않는 인간의 어떤 지점, 투명함에 관심이 있습니다.. 고단함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삶을 버티고, 떠나기를 몰래 꿈꾸고, 저마다 홀로 피로와 시련을 감당해 내는가 하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가끔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라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온 한국의 땅에서 피어난 문학은 한국인을 넘어서 세계인의 문학이 되었습니다.
한국문학은 지금부터 명쾌하게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것을 의미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