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게 본 영화 '아가씨'보다도 훨씬 치밀했던 [핑거스미스]
며칠전 연수 이수증들을 정리하기 위해 책장을 정리하다가 맨 아래쪽 구석 상자에서 옛 일기장을 발견했다.
'내가 이걸 여기다 보관했었던가?'하면서 상자를 열고 첫장을 넘기는데, 일기장 자체에서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낡은 가죽 부스러기들로 떨어져내렸다.
내 스물셋 후반부터 스물넷까지의 기록들이 낡아서 떨어지는 가죽 부스러기처럼 잡힐 듯 말듯한 기억으로 펼쳐졌다.
결혼을 하고 두달쯤 지난 시점에(그 때 나는 정선의 작은 학교에서 기간제교사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던 남편은 찾던 무언가 대신 종이가방에 묵직하게 들어있던 내 일기장 꾸러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리고 호기심에 한 권 두 권 읽다가 나중엔 끓어오르는 분노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내가 일기장에 써놓은 달콤한 연애의 기록들은 갓 결혼한 남자가 받아들이기엔 결코 달콤하지 않았었고...일기장의 그 부분을 뭉텅 잘라내버리고나서야 겨우 사건은 일단락되었었다.
그렇게 내 비밀은 사라진 듯했고, 그 이후로 나는 종이에 일기를 쓰지 않았다.
(몇 년 후 다시 쓰긴 했지만, 그 기록물은 현재 내게 남아있지 않다.)
십육년이 지나 다시 펼친 일기장은 잘려나간 기억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사라진 부분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영상으로 되살아났다.
일기장 속의 디테일한 감정 묘사들은 남아있지 않지만, 나 스스로의 자체검열로 인해 기록되지 못한 추억의 단편들이 아직 가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기록은 사라져도, 비밀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밀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비밀을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는다.
단지, 가슴 속에만 남긴다.
각설하고...초등학교나 중학교때의 일기처럼 모골이 송연해지는 유치함은 없었지만, 그래 내가 이때 이랬구나...하는 아련함이 꽤 오랫동안 나를 책장앞에 머물게했다.
사설이 길었다.
[핑거스미스]에서 '수전'을 며칠이나 끙끙 앓게 만들었던 비밀의 문서를 이야기하려다 괜한 이야기만 늘어놓은 듯하다.
영화 [아가씨]를 본 감상평은 물론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주인공들의 연기, 구성 자체가 너무도 탄탄하고 인상적이었다. 그 감동의 연장으로 [핑거스미스]를 구입했고, 830페이지가 넘는 긴 내용을 후루룩 읽어버렸다. 그리고 [아가씨]보다 [핑거스미스]가 주는 스토리의 강인함에 완벽하게 매료되어 버렸다.
[핑거스미스]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영화에서처럼 수전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젠틀먼의 권유와 공모로 아가씨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나 점차 여리고 순수한 모습의 모드에게 빠져드는 수전...하지만, 결국은 젠틀먼과 모드의 모략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것으로 1부는 끝이 난다.
2부는 모드의 시선이다. 수전이 알고 느끼는 모습의 모드와는 달리 어린시절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다 삼촌에게 불려와 삼촌의 목적대로 훈육(?)을 받으며 자란 모드는 절대 연약하거나 순수하지 않다. 단지 삼촌에게서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젠틀먼과 공모하여 수전을 이용하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는 수전의 모습에 이끌리고 의지하게 된다. 일단은 저택을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던 모드...그러나 탈출 후에 모드에게 닥친 현실은 그리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3부는 대 반전이다. 영화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보모인 석스비 부인이 모든 사건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17년전 수전의 어머니와 모드의 어머니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계약을 시작으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그 내용은 상당한 스포일러가 되므로 함구...
남성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억압받던 여성들이 동성애적인 코드이지만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린 단지 이런 고립된 장소에 너무나 오랫동안 같이 있던 것뿐이다.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는 너무나 솔직하고, 너무나 풀어져있고, 너무나 자유롭다. 수는 하품하고 기댄다. 여기저기에 스치고 까인다...
우리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비밀이었고 비열한 비밀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이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은 누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사기꾼은 누구인지 정리해보려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비밀'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기는 일, 또는 알려서는 안되는 일'이다.
가슴 속에 비밀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남의 비밀은 알고 싶고, 내 비밀은 밝히고 싶지 않은 법...
나에게도 비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