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마무시한 업무로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비상계단으로 도망치듯 뛰어가 누가 들을새라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유리멘탈이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너무 힘들면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빨리 다른 선생님들처럼 일하고 싶다는 욕심에 내가 나를 가장 아프게 채찍질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어느정도는 마음을 내려놓고 시간에 맡겨야 했다. 한번도 혼나지 않는 신규 간호사는 없다.
그래도 다행히 울고있지만은 않았다. 빨리 퇴근하겠다는 일념으로 재빨리 서러움을 비워내고 마치 전쟁터를 향하는 양 비장한 마음으로 바깥으로 나와 끝맺음 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 하나 쳐내갔다. 그럼에도 나머지 공부는 일상이였지만 견딜 수 있었다. 나에게는 분명히 환자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따뜻함이 있었고, 이것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공부하면서 내 안의 빈 퍼즐을 메꿔야만 했다.
'독립'했던 날을 기억한다.
프리셉터 선생님의 도움없이 나 혼자 16명의 환자를 케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목에 턱 걸려 답답함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던 전 날 밤도 기억한다. 기가 죽어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들이 해주신 응원들은 너무도 가볍게 주변으로 흩뿌려지며 사라져갔다. 어차피 오늘도 식사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친구들이 미리 챙겨준 초콜렛 하나를 주머니에 슬쩍 담고 탈의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더없이 진지했다. 그리고 소원 하나를 빌었다.
"내 근무시간동안 환자들이 스테이블(stable)하길."
새벽에 채혈한 피 검사 결과가 나오는 오전 10시, 아마 환자들보다 내가 더 떨릴 순간일 것이다. 어제 수술한 환자들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기준치 이하로 떨어졌을 경우, 의사에게 알리면 수혈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경력 간호사에게야 수혈 따위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신규에게는 그 정도의 이벤트도 노땡큐였다. 긴장하면서 화면을 더블클릭 하자 보이는 수치가 다행히 괜찮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독립'일 치고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심을 하는 순간 뒷통수를 얻어맞는게 우리네 일이 아니던가.
임신성 고혈압을 진단받고 입원해있던 산모 한 분의 혈압이 심상치 않다. 일반적으로 정상 수축기 혈압은 120이다. 어제부터 혈압이 조금씩 올라간다 싶어서 안그래도 불안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근무하는 지금 160까지 치고 올라왔다. 관련 증상은 없음을 신속히 확인했지만 그걸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바로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자, 혈압 약 하나를 응급으로 추가 처방하였다. 바로 주사기로 약을 재서 환자에게 가져가 설명하려는 찰나, 산모가 주사기를 보자마자 격하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신은 절대 혈압 약을 맞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던 남편은 울먹거리는 아내의 손을 단단히 잡아줄 뿐 아무 말이 없다.
“저, 저번에도 그거 맞았어요. 혈압 약 맞으면 아기가 잘 놀지 않는 것 같다구요! 저 안 맞을래요.”
산모가 언제 경련을 일으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만약 엄마가 경련을 한다면, 아기에게로 가는 혈류가 일시적으로 차단되서 심각한 경우 태아가 사망할 수 도 있다. 그걸 다 알고 있더라도, 약을 맞으면 아기가 당장 잘 안노는것처럼 느껴져 불안한 산모의 마음이 이해가 아예 안되는 것은 아니였지만 아무리 다독여도 설득이 안되니 솔직히 산모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는다.
산모의 혈압상승이 일시적인게 아니라 질환이 점점 중증으로 진행되어 감을 알리는 신호였다면? 흐릿한 시야나 두통 같은 심각한 증상이 결국 발현된다면? 산모의 주수를 고려했을때 응급 제왕절개수술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였다. 슬슬 내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예상에 없던 수술준비를 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 그려지며 내가 챙겨야 하는게 무엇인지 딱 떠오르지 않아 순간 불안해졌다. 서둘러 오른쪽 주머니안에 보물처럼 모셔놓은 수첩을 꺼내어 관련 내용을 적어둔 페이지 모퉁이를 접어 표시해두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일단 병실 커튼을 치고 나오고선 이 산모를 어떻게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해보았다. 순간, 줄곧 입을 닫고만 있었던 보호자가 산모를 설득하는 목소리가 커튼 너머로 들려온다. 이때다 싶어 나도 끼어들어 밥숟가락을 얹었다. 그렇게 겨우 겨우 혈압약 투약에 성공하고 한 숨 돌리나 싶었는데 아뿔싸,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나갔다. 이미 마쳤어야 할 일이 한참 쌓였다는 사실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처치실로 돌아가 지금 당장 환자들에게 투여되어야 하는 약들을 정리해서 다시 병실을 돌기 시작한다. 혈압약 투약후, 산모의 혈압이 과연 괜찮아진건지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이벤트가 있던 상당수의 환자들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해야했다.
점심 먹을 시간은 역시 없다. 끝나지 않는 병실 순회를 빈속으로 하다보니,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온다. 이대로 카트를 밀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슬쩍 가면 아무도 눈치 못채지 않을까?이런 어이없는 생각에도 마음이 홀려 3초 정도 멈칫했다. 배가 고프니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직장생활이라는 건, 일이 힘들더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괜찮다면 버틸만한 것이 아닌가. 일도 힘든데, 사람도 힘들다면 그 직장은 누구라고 할 것없이 '최악'이라는 평을 내릴 것이다.
나보다 3개월 정도 먼저 이 곳에 입사한 선생님이 있었는데, 출근시간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만약 데이 근무라면(데이 근무시간: 오전7시~오후3시) 그 선생님은 꼭 다섯시, 늦어도 다섯시 반 쯤에는 병동에 도착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선 저렇게 빨리 오는 건 여기서 일할 깜냥이 안되는거라며 그녀의 업무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다른 선생님들의 말이 나에게도 싸늘하게 꽃혔다. 하루는 그녀가 출근시간 30분 전에 병동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선생님 하나가 오늘은 출근 안하는 줄 알았다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은 이미 다른 층의 간호사 전용 컴퓨터실에서 공부를 하다 뒤늦게 시계를 보고 내려온 것이였다. 병동에서 옳다고 여기는 기준은 확고히 정해져 있었다. 신규는 출근시간보다 딱 1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이 이곳의 정답이였다.
신규 간호사의 미숙함을 끌어안아 토닥이며 끌어줄만큼, 병동의 시간 역시 여유롭지 않다. 연차가 높은 간호사들조차 종일 허덕이다 한 두시간씩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곳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밑바닥을 한번도 보이지 않는 자는 성자라고 불리울만 하다. 하긴, 생각해보라. 인간의 3대 기본욕구가 '식욕,수면욕,성욕'이라고 하더라. 성욕은 논외로 치고, 이 곳에서 직원 개인의 식욕과 수면욕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연차가 쌓여 숨 좀 쉴만해진 친절한 저 주치의도 2년차일때에는 헐크나 다름없었다 하더라. 여러모로 이 곳은 만만한 일터는 절대 아니였다.
언제 혈압이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지켜봤던 산모의 상태가 다행히 많이 안정됐다. 이른 주수의 태아에게는 하루하루가 몸무게를 불릴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이다. 부디 하루라도 더 엄마 뱃속에서 편히 있길 바란다.
오늘은 옆팀 선생님께서 내 점심식사도 챙겨주셨다.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나 이미 차갑게 식긴 했어도 이렇게 배가 고픈데 뭘 먹어도 맛이 없을리가 없다. 소중히 도시락을 가방 안에 담았다. 이따가 저녁으로 먹어야지.
오늘은 '독립'날이자, 병동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날이였다. 속상해하지말자. 힘든 날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다는 오기가 생긴다. 눈물 콧물을 가려줄 마스크도 얼마든지 있다. 세익스피어의 소설 속 글귀처럼, 밤이 아무리 길어도 낮은 반드시 찾아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