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간호사 Jun 12. 2020

4. "잠은 재워주세요."

그러고도 일해야 하니 전사인가보다. '백의의 전사'

"나이트번(나이트 근무시간: 오후11시~다음날 오전 7시)은 이따가 11시까지 꼭 와!"


병동의 빈 침대를 바라보며 저기 누워서 딱 1시간 정도만 쉬고 싶다고 100번 정도는 생각한 것 같던 첫 나이트 근무를 겨우 마치고 물먹은 솜처럼 병동을 나서는데, 그 무거운 뒷통수를 향해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나중에 있을 캠핑 행사에 늦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하신다. 이미 젖은 머리 뒤로 기름이 든 풍선을 던져 터트리는 것만 같았다.


"오늘 나이트 일은 토다, 니가 다 해야해. 프리셉터 선생님 좀 쉬어야지. 너도 빨리 한 사람 몫을 해야돼~"


늘 그렇듯 대답은 밝게 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병동을 빠져나갔다. 대부분은 웃는 얼굴인 프리셉터 선생님의 옆모습도 지금은 그늘져있다.


물론, 11시는 밤 11시가 아니다. 오늘 역시 나이트 근무이기에 그 시간이면 병동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놀랍겠지만, 오전 11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시계를 보니 8시, 집에 도착하면 9시는 될테고 씻고 자리에 누우면 9시 30분, 그런데 다시 병원에 가려면 10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간단한 산수를 해보니 30분밖에 쉴 시간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너무 비인간적이다. 나이트번 선생님들께서 오늘 힘들어서 어떡하냐면서 투덜대시는데, 신규는 입이 무거워야 하기 때문에 리액션은 하지 않고 가만 듣고만 있는다. '며느리는 벙어리 3년'도 아니고 신규간호사라고 발언권도 없냐 싶겠지만, 일전에 프리셉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장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신규는 가능하면 말은 많이 하지 않는게 좋아. 괜히 뒤에서 말 나올 수 있으니까"


이미 나이트 근무를 했는데, 조금도 쉬지 못한 채로 또 다시 밤샘근무를 해야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어찔어찔해진다. 이래서 간호사를 '백의의 전사'라고 부르는 걸까?

나는 이 순간 다짐했다. 지금은 나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지만, 나중에 내가 경력이 아주 아주 많이 쌓인 간호사가 된다면 병동 행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휴가이거나 밤샘근무를 해야하는 간호사들은 절대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집으로 가는 길, 손을 맞잡고 팔을 아래로 당겨 스트레칭으로 밤새 굳은 몸을 풀어주면서 그런 다짐을 했다. 현실은 병동에서 먼지보다 못하다는 신규 간호사였지만 말이다. 시간은 언젠가 나도 올드로 만들어줄테다.


눈부신 햇살 아래, 길거리에 보이는 이제 막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뽀송뽀송하다. 여리한 파스텔톤 블라우스에 목에는 사원증을 메고, 손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또각또각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구두 소리에 정신이 확 든다. 순간, 떡진 머리에 기름기 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방금 거울이라도 본 듯 선했다. 창피함에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다리가 부었는지 한걸음 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나는 저들이 일 할 시간동안 쉬었을테다. 생각해보면 근무시간대만 다를 뿐, 일하는 총 시간은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한번의 나이트 근무에서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는,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의 어마무시한 가치를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삼교대가 너무 좋아. 어떻게 5일 연속해서 매일 매일 출근할 수 있어? 힘들어서 그렇게는 못살 것 같다. 우리는 은행도 쉽게 갈 수 있고, 맛집 예약도 쉽고,비행기표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잖아."


일전에 들었던 선배간호사의 말이 떠오르는데, 아무래도 거짓말이지 않았을까. 사실 정신승리처럼 느껴진다. 3교대 임상이 체질이라던 그 선배는 얼마 뒤에 병원을 완전히 떠났다.


씻고 침대에 눕자, 몸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다 못해 빠져들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는 30분 안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겠다 싶어 앉아 있기로 했다.

5시 행사이지만 11시까지 병동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미리 누군가가 챙겨놓은 짐들을 캠핑장까지 옮기고,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오늘 먹고 마실 것들 장도 봐야 하기 때문이였다. 또 캠핑장에 일찍이 도착하여 나중에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도착만 하시면 바로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셋팅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까지 이를 필요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은 2시 정도에 벌써 마무리되었다. 여유 시간이 생기자 비로소 사람들은 수간호사 선생님 흉을 보며 투덜대기 시작한다. 그들도 누구보다 쉬고 싶었을 테지. 그래도 기왕 캠핑장에 놀러온 거, 피할 수 없다면 즐겨나 보자고 누군가가 챙겨온 스피커로 댄스음악을 틀며 분위기를 업시킨다. 어색한 그루브를 타기 시작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자니 조금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곳의 수풀은 꽤나 아름답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다음에는 친구들과 놀러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날, 내가 고기까지 굽진 않아서 다행이였다. 하지만 맥주 한 잔을 따라주시는 수간호사 선생님의 손이 미웠다. 아무리 그래도 술을 마신 채로 환자들을 간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만약 침상에 누워있는데, 혈압커프를 감으려고 다가오는 간호사의 날숨에 술냄새가 풍긴다면? 아마도 나는 무서울 것 같다.

받은 잔은 입도 대지 않고, 얌전히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다행히 아무도 더이상 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날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심장이 세차게 뜀박질하듯 콩닥거리는게 느껴진다는 것을. '심계항진'이란 의학용어를 오늘 또 내가 이렇게 몸소 배우는구나.

이전 03화 3."야, 밥 먹을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