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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호사 Jun 13. 2020

5."선생님은 뭐 사주실꺼예요?"

저번에 받은 그건 진짜 별로였는데...

'독립'이 머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는 프리셉터 선생님의 도움 없이 내 팀의 환자 16명을 오롯이 나 혼자 책임져야 한다. 신규 간호사가 독립을 한다는 건 단순히 개인의 이벤트가 아니다. 뒤 근무조의 같은 팀 선배 간호사들은 이제 프리셉터의 첨언 없이 신규 간호사의 얼빠진 인계를 듣고 일을 해야 한다. 한 선생님께서는 내가 독립을 하자, 한달 정도는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병동에 도착해서 스스로 환자파악을 했다. 신규 간호사의 떨리는 입보다는 자신의 눈을 믿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였다. 신규 간호사와 다른 팀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는 없다. 같은 근무시간대의 선생님들은 얘가 어리버리하게 돌아다니면서 혹시 무슨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기일을 하면서도 옆팀의 환자 정보를 수시로 열어 이건 어떻게 한건지, 저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계속해서 확인해야 한다. 그러한 연유로 내 독립을 카운트다운하는 건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였다. 신규 간호사의 독립은 모두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 번은 콜벨이 눌린 병동으로 뛰듯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들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또렷한 목소리로 내 걱정을 하는 선생님들의 푸념이 등 뒤로 들려왔다.


"쟤 다음주에 독립인데, 어쩌려고 저러냐...."

"아직 모르는거 엄청 많지 않아요? 저번엔 글쎄,"


학생 때 영어 단어 암기에 도움이 될 거라며, 가지고 다니면서 틈틈히 볼 용도로 작은 수첩을 구매해본 적이 있었다. 첫 눈에 반한 디자인의 스타벅스 다이어리가 너무 갖고 싶어서 별로 마실 생각이 없는 커피와 프리퀀시를 맞바꿨고, 반드시 원하는 색상으로 받겠단 일념으로 지하철 역을 몇개나 지나쳐 걸어다니며 나오는 스타벅스들을 샅샅이 뒤져서 결국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 그럴때마다 처음에는 잘 나오는 펜을 골라잡아 첫장에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보며 설레어 했지만 결국 그것들은 절반, 아니 반의 반의 반 분량의 페이지도 채워지지 못하고 다음 해에 분리수거 봉투에 버려졌다.


하지만, 병원 근처 문구점에서 대충 산 이 수첩은 앞에 말했던 것들과는 중요도의 무게감이 남달랐다. 꼬박 한달동안 뛰어다니며 듣고, 배우고, 곁눈질로 눈치껏 필기한 여러가지 정보들이-비록 급하게 쓰느라 글씨는 엉망이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으니 됐다-한 권 가득 담겨 있었다. 잃어버리는 순간, 나는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수첩이 들어있는 오른쪽 포켓을 계속해서 만져봤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했어도 아직 모르는 게 산더미였다. 이곳, 산부인과 병동은 단순히 산과 환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였다. 감염,수술,항암 등 다양한 부인과 환자들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서 간호사가 챙겨야 할 업무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신규 트레이닝이 한달 정도로 짧은 탓에,  비교적 흔하지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케이스도 많이 있었다. 


이상하다. 나도 학교에서는 나름 우등생이였다. 그동안 꽤나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는데,그때마다 일 익히는 속도가 빠르다고 칭찬도 여러번 들어왔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이곳의 나는 그냥 천덕꾸러기였다. 일 못하고 눈치 없는 신규 간호사.


" 난 같은거 두 번 물어보는거 제일 싫어해요. 한번 알려줬잖아. 그런데 왜 또 물어봐?"


필기한 수첩을 3번은 읽어보고도 내가 원하는 내용을 못찾았거나, 필기된 내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모기소리로 여쭤보면 늘 큰 소리로 핀잔을 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한 번은 나 이거 정말 배운 적 없다. 그리고 너는 정말 한 번만 배우면 머릿속에 딱딱 입력되서 신규때부터 혼자 일 잘했느냐고 따져 물어보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답답한 가슴을 토닥이며 참아냈다. 어찌됐든 모르는 내가 죄인이다.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론이여도 실제 환자에 적용하려고 하다 보면 아리쏭할 때도 많았다. 요의는 있는데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는 환자에게 소변줄을 꽂기 전, 소독솜으로 닦아내면서 요도를 찾는데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변줄을 아무데나 얼추 꽂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애꿎은 소독솜만 들었다 내려놨다 반복했다. '월리를 찾아라'가 이거보다 백만배는 더 쉬울 것 같다. 죄송스런 마음으로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니, 비록 길게 한숨은 내쉬셨지만 바로 오셔서 시범을 보이시며 알려주신다. 감사한 일이다.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런 상태에서 '독립'을 하여 한명의 몫을 하는 자리에 내가 감히 앉아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 나에게 프리셉터 선생님은 "다 준비된 상황에서 일을 시작하는 신규는 없어. 일 하면서 배울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을꺼야. 모르면 니가 판단해서 일하지마. 꼭 옆에 선생님한테 물어봐. 지금이 그나마 다행이야. 신규니까 모르는게 당연한거잖아. 그런데 지금 물어보지 않고 나중에 모른다고 하면 그건 진짜 창피한거다"라고 말씀하시며 다독여주셨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머지 공부를 하기 위해 매일같이 12시간씩 병동에 있었다. 병원이 내 발목에 보이지 않는 쇠고랑을 채워놓은 것 같았다.




그 날도 신규 간호사의 미덕인 "한시간 일찍 출근" 미션을 가뿐히 달성하고 인계장을 보며  내가 오늘 볼 환자들에게 밤새 어떤 일이 있었나 파악하고 있던 차였다. 한 선생님께서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이트 근무를 해서 지쳐있을 법도 한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깨를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쭉 내밀고 말을 건다.


" 선생님, 신규턱 뭐할꺼예요? 저번에 핸드로션 받았었는데 사실 그거 별로였거든요. 병동에 널린 게 핸드로션이잖아. 센스있게 준비해야돼요"


이 전에 누군가가 '독립턱'으로 핸드로션을 돌렸나보다. 알고보니 이 병원에서는 신규 간호사가 독립 전에 앞으로 함께 일할 선생님들께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작은 선물을 돌리는게 관행이였다. 병원 동기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비단 이 병동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암묵적으로 선물을 돌리는 날짜와 금액 선도 정해져 있었다. 아까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센스없이 준비하다간 '주고도 욕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안그래도 독립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신규간호사에게 떨어진 예상 못한 또 하나의 관문이였다. 


선물이라는게 참 그렇다. 내가 정말 마음이 동해서 준비하는 것과, 반강제로 상대에게 요구 받아 준비해야만 하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독립턱'을 부모님 생신 선물보다 더 고민해서 골랐다. 병동원에게는 텀블러를, 프리셉터 선생님에게는 14k 목걸이를 준비해서 작은 메모지와 함께 병동 한켠에 두었다.


그 다음 날, 출근하는 날 쳐다보며 올드 선생님 한 분께서 너무 비싼걸 선물했던데 괜찮냐며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선물받은 것의 가격을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셨는지 구체적인 금액도 맞추신다. 무리한거 절대 아니라며 오바해서 손사레를 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신규 트레이닝 한달 동안 받은 적고 소중한 월급을 모두 써버렸다. 


이후 '신규턱'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간호부에서는 앞으로 이런 문화를 근절하라는 공지문을 내렸다. 지금은 이런 이상한 관행이 없어져서 천만다행이다.  누군가는 아쉬워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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