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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호사 Jun 11. 2020

3."야, 밥 먹을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

점심시간은 따로 없었다.

신규 간호사의 업무 적응을 위해, 약 한달간은 '프리셉터'라고 해서 그 병동에서 깨나 힘 좀 쓴다는 경력 간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실무를 익히게 된다.

산부인과 병동으로 발령난 것을 알았을때, 긴장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생 때의 '모성간호학' 성적을 떠올리며 이론으로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감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햇병아리의 공허한 자만이였을뿐. 나는 랩하듯이 귀를 타고 빠져나가는 처음 들어보는 의학용어들을 받아쓰기 급한 신규 간호사였다.


신규간호사는 필기 머신이 되어야 한다. 무력하게 서있기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겸허한 자세로 펜을 든 손이라도 날렵하게 놀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학생간호사가 아니다. 더이상 관찰자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이건 한달 뒤에 당장 내가 해야하는 일들이다.


프리셉터는 신규 간호사를 가르친다고 해서 딱히 평소보다 환자를 덜 보거나 일을 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육수당 따위가 더 추가되는 것도 아니다.  즉, 해야 하는 업무만 배가 되는 셈이다. 지금 당장 쳐내야 할 일이 이미 너무도 많은데 말이다. 이런 업무 스트레스는 태도로 뱉어져 신규 간호사에게 따끔하게 전해질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례로 들어왔다. 질문했는데 대답을 잘 못한다며 신규의 무릎을 주사 바늘로 찔렀다는 프리셉터가 있었다더라는 등 괴담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도 설마 아무렴 그렇게까지 하겠어.


신규 간호사는 프리셉터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엉덩이라도 가벼워야 한다. 나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였다. 수간호사 선생님께서 마음 써주신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프리셉터 선생님은 병동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 안되는 선생님 중 한분이여서 서로 불편함이 덜했다. 화도 웃으면서 낼 것 만같은 선한 인상의 선생님은 '태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프리셉터와 스케쥴이 최대한 많이 겹칠 수 있도록  짜여져 나온 스케줄은 탈의실 장에 바르게 붙여 놓았다.


나의 첫 출근은 프리셉터 선생님과 함께 하는 데이 근무였다(데이 근무 시간: 오전 7시~오후 3시). 신규 간호사의 미덕이라 불리우는 '1시간 일찍 출근'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느라 잠을 거의 못 잔 나는 찬물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어서 미리 챙겨온 텀블러 하나 가득 물을 채워 구석자리에 슬쩍 두었다. 그걸 본 옆 팀 선생님께서는 "쟤좀봐,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물 마실 생각을 해?"하며 옆에 서 있는 다른 선생님과 곁눈질로 날 슬쩍 쳐다보시는데, 작은 목소리긴 했어도 분명하게 들릴 정도의 음성이라 괜히 뜨끔하면서 텀블러를 가져오는게 잘못이였나 싶어 주눅 들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말 뜻을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데이 근무 속의 나는 한창 시끄러운 한낮의 시장바닥 정 가운데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잘 모르기에 움직임이 부산스러웠고 정신없었다.


병동에 걸려오는 전화나 콜벨은 무조건 신규간호사가 받아야 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더라도, 벨소리가 두 번이 넘어가면 전화 좀 잘 받으라며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 병동은 2개의 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만약 옆 팀의 환자와 관련된 연락이면, 전화기를 들고 상대팀 선생님을 찾아 달리기를 해야했다. 보통 전화를 주시는 분들은 환자나 보호자, 교수님, 아니면 지금 굉장히 바쁘다는 걸 어필하는 검사실이나 약제팀 직원들이였다.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시는 경우는 많지 않으므로 빨리 전달해야만 한다.

신규간호사는 천천히 걸으면 안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전력 질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빨리 걷다보니 그게 달리기처럼 보이곤 한다.


정규시간대와 가장 많이 겹치는 데이근무는 숨돌릴 틈이 없었다.


스테이션 벨이 울려 달려가면 전화기도 울리기 시작한다. 내 귀가 2개니 둘다 받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양쪽 귀에 수화기를 대고 통화하고 있는데, 또 다른 전화벨이 울리자 옆 선생님이 날 슬쩍 한 번 쳐다보곤 한숨을 쉬며 받는다. 이송요원님이 수술 끝나고 환자 내려왔다며 간호사를 찾고 있고, 그 옆으로는 바로 엉덩이를 떼고 달려오지 않는 간호사를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보호자가 서있다. 병동 끄트머리에서 입원생활안내 종이를 들고 빼꼼히 서있는 신환은 당일 수술 예정이라 챙길 것이 산더미일테지. 병동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환자가 얼굴을 내밀고 수액이 잘 안떨어지는 것 같다며 간호사를 찾는다. 어제부터 열이 났던 수술환자는 지친 얼굴로 진통제 더 없냐며 젖은 옷을 입고 서있고, 옆 팀 산모는 내일부터는 우유말고 두유로 바꿔달라며 식단 체크 종이를 내민다. 어제 입원해서 오늘 항암제 투여 예정이였던 환자는 주사 라인이 막힌 것 같다고 하는데,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이미 스케쥴링된 약시간이 전부 밀려서 뒷 턴 선생님한테 일을 미루는 꼴이 된다. 언제 왔는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레지던트쌤은 어제 수술한 그 환자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수혈오더를 냈다는 말을 남기곤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이 모든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였다.  나는 거의 날라가듯이 움직이며 선생님들에게 현황보고를 하고 학생간호사도 할 수 있을만한 기본적인 업무들도 빠듯해하며 쳐냈다. 분명 날씨는 가을이였고, 새벽에 출근했을 때만 해도 선선했던 병동도 어느순간 덥다. 그러고보니 양말이 다 젖었다. 난 학교에서 달리기를 할때에도 티셔츠는 땀으로 적셔봤지만, 양말까지 젖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바로 '점심시간'. 환자들도 밥은 먹을테니, 12시부터 1시까지는 좀 쉴 수 있겠지란 안일한 생각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챙겨 나온 텀블러엔 입은 커녕 손가락 하나 댈 시간도 없었다. 다행인건 마신게 없다보니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단 것이였다.

하지만 이상하다. 12시가 넘었는데도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계속해서 병실로 올라오고, 보조원님은 수혈할 혈액을 가져다 주신다. 오전 외래를 보고 입원하게 된 신환들도 계속 올라오고 있다. 언제 퇴원 완료되냐면서 스테이션에서 기다리는 보호자의 모습이 급해보인다.

아, 병동에서는 점심시간이라는게 없는 거였구나. 수간호사 선생님만이 식사를 하시기 위해 조용히 사라진 병동에서는 오전 시간과 비슷한 카오스가 반복되고 있었다.


두시 정도가 되자, 프리셉터 선생님께서 밥은 먹고 일하자며 운을 뗐고, 옆 팀 주니어 선생님이 급하게 메뉴판을 꺼내서 주문을 넣는다. 나에게는 먹고 싶은 메뉴조차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밥 한공기'만이 추가가 되었지만 서러울 겨를도 없었다. 애매한 시간의 주문이라 그런지 쏜살같이 도착한 배달음식을 후다닥 탕비실로 가져가 세팅했다. 아, 이제야 좀 쉬는건가. 이렇게 밥시간도 없이 일하는 건 사람답지 못하다. 오늘만 이렇게 일하는 거겠지? 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점심시간은 따로 없는지에 대해 선생님들께 여쭤보자, 처음으로 프리셉터 선생님께서 면박을 주신다. "야,그런거 없어, 밥 먹을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


선생님의 대답에 절망스러웠지만  순응하는 척 리액션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 간호사를 부른다.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이였다. 진짜 배고파서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넣으려는 찰나에 일이 생겨 슬픈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는 것. 바로 엉덩이를 떼고 밖으로 나갔다. 서둘러 처치를 마치고 탕비실로 돌아 왔지만, 이미 밥상은 깨끗하게 치워진 뒤였다. '덤'으로 밥 한공기 추가한 입장이였지만 마음이 쓰렸다. 속도 쓰림은 물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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