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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간호사 Jun 09. 2020

1."간호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는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스물일곱, 다시 새로운 학부에 들어가 무언갈 배우기 시작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나이. 젊은 날의 절절한 4년을 온전히 투자하면서 때로는 배우는 재미도 있었던 전적대학의 전공을 이제는 완전히 포개어 접어 넣어야 한다는 아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그저 먹고 사는걸 목표로 두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에 담은 야망 하나는 불태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시작한 길.


'간호사'란 직업은 나에게 그러한 의미였다.


"간호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거야." 한창 눈을 초롱거리면서 수업을 듣는 간호학과 2학년 시절, 한 교수님께서는 너희는 처음부터 간호사로 태어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니 자부심을 가지라며 자주 우리들을 치켜세워 주셨다.

단순히 의사의 오더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닌, 전문직다운 높은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의료진인 의사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하며 환자의 치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간호사. 그 목표 하나가 산더미 같은 공부량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간호학과에서의 일상은 '공부는 다 때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였다. 학사편입을 한 덕분에 안 그래도 대학생 2학년 치고는 많은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로, 대부분의 과 동기들과는 처음부터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어떤 친구는 날 볼때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식사는 맛있게 '드셨냐'며 깍듯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하긴 나는 친구를 사귀려고 이 곳에 와 있는건 아니였다. 동시에 동아리 활동을 두군데씩 하면서 매일 밤마다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고 인생을 논하던 치기어린 놀이는 진작에 많이 해봐서 다행이였다. 

만약 공부까지 못하는 편입생이라면 더더욱 나는 친구가 없었을 것이다. 간호학과는 다른 학과와는 다르게, 이른바 빅 5 병원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성적보다는 석차 퍼센티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입사공고에 우리 병원은 성적 상위 몇 퍼센테이지까지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제한을 둔 곳도 은근히 많았다. 자연스럽게 과 동기들 사이에서도 성적이 좋은 학생이 우선적으로 인정받는다. 간호학과의 꽃은 아무래도 '높은 취업률'이니만큼, 연봉이나 복지수준이 높은 빅 5 병원 입성은 모두의 바람이며,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이유였다.

남들보다 늦게 스타트라인에 선 만큼, 부족하다는 말은 더더욱 사절이었기 때문에 초등학생 때 조차 하지 않은 예습, 복습을 매일 매일 하며 시험기간이 아님에도 시험 기간처럼 공부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교수님께서 레포트 과제를 주시면 보통 2~3장이면 타이핑으로 마무리될 것도 손글씨로 10장씩 써가며 준비해서 제출한 적도 있었다. 다들 치열하게 경쟁하였기 때문에 노력으로라도 승부하고 싶었다.

학사편입으로 2학년 수업과정부터 참여하였기에, 다른 동기들보다 배우지 못했던 과목들이 여럿 있었다. 또 20대 초중반 때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팽팽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었고, 기왕 시작한 거 누구보다 똑똑한 간호사가 돼보자는 마음속 뜨거움으로 수업들을 버텨냈다.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에 자리를 잡는 것부터 경쟁이다. 밤을 새우다시피 공부하다가 졸릴때에는 가져온 침낭에서 쪽잠을 자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그래도 꾸준한 노력이 승리하는 법이였다. 나는 첫 학기부터 성적 장학금을 받으면서, 매 학기마다 줄곧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빅 5병원에 취업이 가능할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이었다. 

4학년, 취업시즌이 되자 학생별로 취업지도 교수님이 정해졌다. 유명 대형병원들은 한 명의 학생이 여러 병원에 동시에 입사지원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원시, 지도 교수님의 '추천서'를 첨부할 것을 공고에 명시하였다. 이전 공대생 시절에는 취업하려면 몇십군데 정도의 회사에 입사지원을 하는 것이 당연했었는데 참 상반된 분위기다 싶었다.


첫 취업상담자리에서, 지도교수님께서는 대뜸 이렇게 운을 떼셨다.


"지금 나이가 29이구나. 그럼 솔직히 빅 5병원은 힘들어. 거기는 나이를 많이 봐. 너는 성적이 좋아서 아쉽겠지만 어쩔 수 있겠니. 그래도 이런 대학병원들은 나이 많아도 합격하는 사례가 있었으니까, 한번 지원해봐."


나는 꼭 서울의 내로라하는 유명 대형병원에 입사하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공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나보다 훨씬 석차가 낮은 동기들도 최종합격하는 병원에 서류조차 떨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도 교수님께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래도 자기 능력이 되면 다 잘 되더라'라고 생각하며 반만 믿었었다. 인터넷에서 나이 많은 학생도 빅 5 병원에 합격한 사례를 찾아보며 의지를 불태워보기도 하였지만 나는 무슨 연유인지 그런 특별한 케이스에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은 그 병원들 이상의 연봉과 복지를 자랑하는 한 대형병원에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입사가 이렇게 기쁠 일인가. 후발주자로 공고가 떴던 병원이였기 때문에 동기들보다는 훨씬 늦은 시기에 맛보는 합격의 기쁨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간호학과 입학의 목표를 이뤄 들뜬 학생들을 보면서 병원 입사 전이 가장 행복할 때라고, 지금을 즐기라며 작은 소리로 혀를 차셨다. 병원 취업에 뒤이어 간호사 국가고시도 가뿐히 통과하여 면허까지 손에 쥐자 인생의 큰 산 하나를 넘은 느낌이였다. 드디어 병원에서 '임상 간호사'로 일할 준비를 다 끝마친 것이다.


이제 병원에서 나를 불러줄 때까지 자유의 기쁨을 느낄 차례였다. 처음에는 입사 시기를 정확히 지정해 주지 않고, 병원의 결원이 발생할 때마다 순번대로 합격자들을 불러 인원을 채우는 방식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식으로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이 없을 경우 몇 년이고 대기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기우였다. 생각보다 빨리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다음 주부터 출근해서 교육을 받으라는 명을 받았다. 왜 이토록 사직률이 높은지에 대해 궁금해 할 겨를이 그때는 없었다. 그저 새로운 직업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이 긴장되고 두근거릴 뿐이었다. 난 참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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