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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Jan 14. 2020

냉이국을 먹는 저녁

주방 창에  냉이국의 뿌연 수증기가 서리는 날



가까운 곳에 월평도서관이 생겼다. 며칠 집에서만 지내니 어두운 기분이 든다. 딱히 외출할 일은 없지만 책을 빌려 보려고 일부러 밖으로 나갔다. 공원 한갓진 구석에 냉이, 달맞이, 꽃다지 같은 들풀들이 바닥에 납작하게 겨울 잎을 펼치고 있다. 빈틈없이 겹치지 않게 잎을 펼친 이파리들은 햇볕 한줌이라도 골고루 나눠가진다. 바닥에 엎드린 들풀들은 겨울바람 앞에서 숨을 죽이고 조마조마하다. 찬바람에 다져진 튼실한 냉이는 검붉은 빛으로 건강해 보인다.  

   

겨울 날씨 치고 따뜻한 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겨울은 추운 계절이다. 들풀들이 꽃을 피우려면 아직 두 달은 더 있어야 한다. 들풀들은 겨울바람 앞에 엎드려서 온몸을 조아리고 이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빈 나뭇가지에 겨울눈(芽)이 볼록하다. 겨울 눈 속에 숨어있는 새순은 바깥에서 들리는 서슬 퍼런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내가 나가야 할 때는 언제인가 기다리는 동그란 겨울눈들이 꼬마전구를 백 개 쯤 달아놓은 듯 촘촘하다.

   

남천 울타리가 소담스럽게 빨간 열매를 가득 달고 있다. 직박구리나 박새 같은 새 들이 좋아하는 열매이다. 시력이 좋은 새들은 멀리서도 나무의 빨간 열매를 알아보고 먹으러 온다. 하지만 남천은 약간의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많이 먹으면 중독된다. 새들도 이를 알고 배불리 먹지 않는다. 덕분에 겨울이 지나도록 남천은 빨간 열매가 탐스럽다.   

 

빨간 신호등 앞에 검정, 회색, 남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멈춰있다. 초록 불에 무채색 행렬이 움직인다. 신호등 맞은편에는 노점 할머니가 올망졸망 놓인 채소 바구니를 두고 시멘트 바닥에 앉아있다. 스티로폼 박스 덮개를 깔고 앉았는데 스티로폼 깔개가 눌려버려서 맨땅에 그냥 앉아있는 것 같다. 검은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길에 빨간 점퍼를 입은 할머니가 홀로 또렷하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냉이 뿌리가 실하다. 굵고 긴 하얀 뿌리는 곁가지를 내고 실뿌리가 실밥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땅 속에서 꽉 움켜잡고 있던 흙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텼을 뿌리들이 바구니에 담겨 차가운 공기에 드러난 허벅지를 덜덜 떨고 있다. 나물할머니도 냉이 이파리처럼 입술이 보랏빛이다. 2천 5백 원짜리 냉이 한 바구니를 사면서 밑동이 붉은 시금치에 눈길이 간다. 할머니는 지금이 시금치가 무척 달고 맛있는 때라며 천원에 줄 테니 가져가라고 한다. 딱히 할 것도 없으면서 시금치도 샀다. 손에 든 검정 봉다리가 묵직하다.


나물을 다듬는데 벌써 향긋한 냉이의 향이 코끝으로 들어온다. 눅은 잎을 대강 떼어내고, 시금치도 국에 넣으려고 다듬는다. 깨끗하고 튼실한 시금치는 다듬을게 없어서 붉은 뿌리 쪽에 칼집을 넣어 네 갈래로 갈라놓았다. 멸치육수에 된장을 심심하게 풀어 끓이고 나물을 넣었다. 국이 끓으면서 주방 창에 뿌연 수증기가 서린다. 묵직하면서 마음이 놓이는 그런 냄새가 집안에 가득해진다.   

 

남편과 반찬 몇 가지에 냉이국 뿐인 소박한 저녁상을 마주했다. 겨울에도 태양의 에너지를 열심히 모아 푸른 잎을 지닌 냉이와 시금치의 기운을 먹으면서 곁불을 쬐는 것처럼 몸이 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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