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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Mar 29. 2020

길 위에서 만났습니다

솜털이  돋아난 얼굴에 유난히 까만 눈과 마주친 날



봄꽃이 흐드러져 어디를 보아도 온 세상이 꽃 천지인 봄이었습니다. 커다란 꽃다발 같은 벚나무를 보면서 의진씨는 나무한그루를 하얀 종이에 말아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건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의진씨는 발그레한 꽃다발이 줄줄이 늘어선 8차선 국도를 시원스레 달렸습니다. 오늘따라 50여분이나 달려가야 할 출근길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봄노래를 흥얼거리며 만화방창의 이 도로를 끝없이 달려도 지루할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작은 도로에 들어서면 파르름한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은 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로가에 만발한 벚나무, 조팝나무와 달리 산에는 꽃소식이 늦습니다. 이제 겨우 눈뜬 작은 이파리들이 강렬한 봄 햇살을 이겨내느라 반짝이는 것이 눈부시기도 하지만 왠지 안쓰럽습니다.  

저 어린 생명들이 이제 세상에 나와서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봄 햇살이 따스하다고는 해도 겨우내 작은 비늘눈 속에 폭 싸여있던 어린 것 아닌가요. 이파리라고도 할 수 없는 물기어린 작은 싹을 내더니 하루하루 잎의 면적을 넓혀 햇빛을 모으느라 잎의 표면을 반들반들 코팅해서 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햇볕이 밝은 곳에 산벚꽃이 일찍 피었습니다

    

의진씨는 꽃보다 잎싹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을 고칩니다. 잎이 있어야 꽃이 있지. 연두잎이 커지고 초록이 되고 나날이 짙어지는 건 참 숭고한 일 같습니다. 작은 산들은 초록물감이 물기 묻은 종이에 듬뿍 퍼져나간 듯이 옅어지고 진해지는 색감을 이어갑니다. 연두색의 도로를 달리는 의진씨의 눈도 연두물이 드는 것 같습니다.     

우와!! 너무너무 예뻐!!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니!! 혼잣말을 연발하며 양쪽으로 늘어선 산을 가르고 시원스런 국도를 거침없이 달려갑니다. 모닝이 언덕길을 올라가며 숨찬 소리를 내며 헐떡거립니다. 룸미러에 뒤따라오는 까만 차가 코를 박을 것처럼 따라붙는 것이 보입니다. 에그, 의진씨는 옆 차선으로 비켜줍니다. 쌩하고 앞서가는 에쎔파이브도 오토바이소리를 내는 모닝도 곧 괴물의 아가리 같은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터널에서 나와 산모퉁이에서 우회전합니다. 쌩쌩 달려왔던 말 꼬삐를 잡아채며 천천히 원을 그리며 모롱이를 돕니다. 2차선 회전로는 의진씨를 바깥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쏠리는 몸을 바로잡는데 무언가 휙 하고 지나가는 게 보이더니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으앗!! 외마디소리를 지르는데 가드 레일을 넘어서는 짐승도 놀랐나 뒤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뛰어 길 아래 수풀로 사라집니다. 고라니입니다. 먹을 것을 찾으려는 건지 위험한 횡단을 한 고라니 덕분에 정신이 바짝 들면서 등골에 땀이 쪼르륵 흐릅니다.     


조그만 소도시를 지나려면 기차역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사고가 많아 긴장하는 게 좋습니다. 차사고 뿐 아니라 로드킬이 특히 많거든요. 생명이 움트는 파릇한 봄은 온갖 꽃들만 흐드러지는 게 아니라 고라니, 너구리, 삵 같은 야생동물도 어린 새끼를 낳아 기르는 육아의 시기입니다.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면 먹이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횡단을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끝없이 이어진 까만 강, 인간이 내어놓은 도로를 건너야 합니다.  

의진씨는 출근하다보면 도로위에 흩뿌려진 동물의 사체와 맞닥뜨립니다. 어쩔 수 없이 신음소리를 내며 붉고 신선한 그것을 밟고 지납니다. 봄은 생명의 환희뿐만 아니라 핏빛 카니발을 발산합니다. 간발의 차이로 고라니를 피했다고 안도하는 한편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이제 5분여정도 거리의 작은 시골 국도가 남았습니다. 허리를 기역자로 구부린 할머니가 길가의 한 뼘 땅에  씨앗을 넣고 있는 시골길을 지나면 저쪽 세상을 콩알 반쪽 만하게 보여주는 작은 터널이 나옵니다.     


모닝이 언덕길에서 가쁜 숨을 뱉으며 야생동물의 생태통로를 이고 있는 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참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천천히 내려가면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굴 저 너머의 세상은 눈앞에 비단 천을 펼쳐놓은 듯 반짝이는 호수가 보입니다. 볼 때마다 어머나!! 예뻐라!! 하고 감탄하게 하는 풍경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펼쳐진 호수의 물결이 일렁이고 어제와 같은 감탄사가 나오려는데 왼쪽 수풀에서 까맣고 작은 동물이 쪼르르 하고 자동차 앞으로 달려옵니다. 저속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뒤에 차가 안 오는 걸 보고 브레이크를 서서히 밟았습니다. 까만 그 아이가 자동차를 지나쳐가기에 충분한 거리와 속도라고 순간 판단한 의진씨는 우선 안심의 마음부터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동물은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갈 것 같지 않은 영원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돌멩이를 밟고 넘어서는 듯한, 이제 겨우 눈뜨고 세상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온 청설모의 등뼈가 바퀴에서 의진씨의 척추로 전해져왔습니다. 의진씨는 몸을 돌리기전의 청설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까만 점을 콕 찍어놓은 청설모의 눈은 솜털이 송송송 나온 얼굴에서 유난히 반짝였습니다. 

    

어미의 턱을 간질였을 그 모습은 이제껏 알았던 못생기고 밉상으로 보였던 청설모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의진씨는 매일 그 길을 지나면서 놀란 눈으로 자기를 보던 어린 청설모를 생각했을 겁니다. 세상에 나와 열심히 살아보기도 전에 자신의 부주의로 죽게 된 어린 생명에게 미안한 마음과 자책이 들어 괴로웠습니다. 

    

열심히 만든 이파리를 벌레에게 내어주고 열심히 만든 열매를 동물들에게 내어주는 숲은 그들과 이익을 나누어가지며 공생합니다. 하지만 자연계의 최상위 포식자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속도는 멈출 줄을 모릅니다. 생태통로가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적어서 동물들은 인간이 만든 도로 위로 목숨을 건 횡단을 해야 합니다. 의진씨는 그 후로 야생동물 출몰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표지판조차도 너무 적습니다. 길 위에서 목숨을 잃는 동물들을 구할 방법은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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