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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Nov 09. 2020

그들은 계절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자연이라는  큰 집에 깃든 작은 이들의 삶 



가을은 빛이 참 곱습니다. 키 큰 양버즘나무 단풍이 바람에 커다란 잎을 흔들어가며 춤을 추면 햇볕은 차라락 츠아라라라 라라락 바삭바삭한 소리를 냅니다.  양버즘 잎은 허공에 소용돌이치다가 바람이 흔드는 대로 날다가 떨어집니다. 햇볕이 어찌나 환한지 눈을 못 뜨겠습니다. 아침 해는 참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비추고 햇볕과 만난 산등성이 그림자는 계곡 아래로 달음질칩니다. 나무다리 바닥에 내린 서리가 햇볕에 반짝이는 것이 미끄러워 보입니다.     


한참을  공들여 꽁꽁 묶은 매미를 간신히 끌고 내려가는 왕거미


행여 넘어질까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다리 난간 사이에 이슬을 달고 있는 거미줄들이 햇볕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빈 거미줄에 먼지만 한 날벌레들이 가득 달려있습니다. 거미줄의 주인인 왕거미는 나무 난간 구석에 알을 낳아 거미줄 실크로 여러 겹 덮어 야무지게 채비를 하고 난 후에 생을 달리한 지 오래입니다.     


지난여름 나는 이 왕거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주로 밤에 사냥 활동을 하는 왕거미가 그날은 아침 해가 산마루에서 한 뼘이나 벗어난 오전인데도 거미줄 한가운데에서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왕거미는 자기 몸보다도 커다란 참매미를 거미줄로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힘에 부치는 먹잇감을 잡느라 왕거미는 한참을 애를 먹고 있었지요. 덩치 큰 매미는 거미줄에 매달려 있지 않고 자꾸 아래로 떨어지려 했거든요. 이걸 어쩐다. 모처럼 잡은 특식인데 놓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지켜봤지요 거미는 먹잇감을 실로 이리저리 싸매고 난 후 오랏줄 같은 실을 당겨서 난간 아래로 매미를 끌고 내려갔습니다. 나는 주먹 쥔 손안에 땀이 고이는 줄도 모르고 왕거미의 성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거미줄을 살펴보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왕거미는 보이지 않고 거미 알집이 보였습니다. 왕거미는 자기 생의 임무를 마치고 저세상으로 돌아갔겠지요. 봄이 되면 알집에서 깨어난 새끼거미들이 가느다란 실에 의지해 아침햇살이 빛나는 저 어디쯤으로 힘차게 생의 첫 비행을 할거고요.   


 

벚나무 줄기에 매미 탈피각이 단단히 매달려 있습니다. 땅속에서 나왔다는 걸 증명하듯 흙 묻은 매미 껍질은 거친 나무껍질을 움켜쥔 채 등이 갈라져 있습니다. 등이 터지고 껍질을 벗고 어른이 된 매미는 지상에서의 치열한 이 주일여를 보냈을 겁니다. 그 짧은 삶 동안에 짝짓기에 성공했다면 후손을 남겼을 테고요. 그러다가 누군가의 삶을 이어줄 먹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지요.     

단풍나무 가지에 넓적배사마귀가 움직임 없이 거꾸로 매달려 있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 등가슴을 잡아봅니다. 가시 달린 앞다리로 가지를 움켜잡은 채 죽은 사마귀는 아무 기척이 없습니다. 가지 뒤편에는 사마귀가 그토록 꿈꿔왔던 알집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미의 배를 채워주었던 어떤 죽음들은 거품 알집 속의 새 생명을 약속해주었습니다.


개울에 자라는 풀에도 빛 고운 단풍이 들었습니다


개울가의 단풍은 유난히도 붉습니다. 물가의 단풍이라서 그런지 붉은 색은 투명해보입니다. 붉은 단풍나무는 올 여름 무척 고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시박 덩굴이 단풍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굳고 튼튼하게 서있는 나무도 여리고 가느다란 덩굴이 한번 올라타면 방법이 없습니다. 한번 감은 덩굴손은 나무 꼭대기를 정복하고 넓은 잎으로 햇볕을 가리게 되면 나무는 햇볕을 차단당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거든요. 다행히도 관리하는 직원이 덩굴을 잘라주어 살길을 찾았지만 단풍나무 윗부분은 휑하게 말라버려 그간의 고난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그만하면 큰 걱정 없이 내년도 살아볼만합니다. 나뭇잎을 갉아먹는 벌레를 사냥하던 사마귀도 후손을 남겼으니 새로 태어날 새끼사마귀들은 나뭇잎의 지나친 손실을 막아주겠지요.    


알을 품은 넓적배사마귀의 배가 바닥에 끌릴듯 무거워보입니다


단풍나무가 사마귀 알집을 숨겨주고, 벚나무는 매미에게 줄 시원한 수액 한 모금을 만들고, 매미의 마지막 숨결은 왕거미의 다음 삶을 이어줍니다. 가시박은 밑동이 잘렸어도 어디선가 재기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생명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삶은 계절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다리 아래 강물은 지난여름 거칠게 흘렀던 장맛비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잠잠해진 물살이 억새 숲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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