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의 친구, 부상 #5

천국의 계단? 지옥의 계단 1일차

by second half

종이를 받아들고 진료실을 나와 집에 오는 길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감정 정리보다 해야할 일과 현상 파악이 먼저 되는 T타입이다. 정리해보면 내가 올해도 내년에도 그리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러닝에서 기쁨을 얻으려면 이 보강운동을 다 해야 한다는거지?


나는 매년 한 해 동안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적고 실천한다. 올해 나의 리스트 1번은 하프마라톤 완주였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출장 일정에 맞춰 5월에 있는 해외 하프마라톤에 슬쩍 등록해 둔 상태였다. 그것도 나의 첫 하프마라톤. 그런데 연초부터 장경인대염으로 21km는 커녕 5km도 뛰기 어려워졌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주차장에서 차를 빼 집까지 왔다. 평생을 숨쉬기만 하다가 러닝이 너무 즐거워지려는 찰나, 부상을 입은 것도 억울한데 뛰기 위해서 저렇게 괴로운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니. 남들은 이런 것 안하고도 다들 잘 만 뛰던데 왜 나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역시 달리기는 나에게 욕심이었나.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오늘은 운동 안해도 된다는 사실이 살짝 좋기도 했다. 이렇게 절망과 안도가 교차하는 가운데, 일단 하루는 푹 쉬었다.


다음 날이 되자 아팠던 장경인대는 신기하리만치 가뿐해졌다. 어떻게든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려면 다음 진료 전까지 숙제를 해야겠다는 다급함, 그리고 다시 그 끔찍한 주사를 맞기 싫다는 절박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헬스장으로 갔다.


평소에 보기만 했지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했던, 천국의 계단이라고들 하는 스테퍼가 보인다. 올라가서 시작버튼을 누르자 천천히 계단이 움직인다. 한 계단씩 올라본다. 아직까지는 할만하다.


바로 옆 스테퍼에 올라온 사람은 속도를 높여서 바로 헉헉대면서 계단을 오르지만, 나는 저렇게 30분을 할 자신은 없으므로 천천히 가 본다. 5분쯤 지나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이내 흐르기 시작한다. 스포츠타올로 닦아내 본다. 5분 더 지나자 헉헉대던 옆사람은 내려간다. 아, 정말 부럽다.


10분이 지나자 슬슬 힘들어진다. 아니, 어떻게 이걸 30분을 하지? 그것도 매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걱정하면서 하기싫다, 힘들다, 못해먹겠다에서 슬슬 험한 말이 나온다. 누가 이걸 천국의 계단이라 했던가? 지옥의 계단이다.


땀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 연신 닦아내어야할 정도가 되자 드디어 30분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나는 1초도, 1계단도 더 하기 싫어서 바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


해냈다. 마치 걷다가 처음으로 뛰었던 때 같다. 힘들었던 만큼 묘하게 뿌듯하다. 몇 분이 지나자, 언제나처럼 모든 순간이 미화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힘들었던 순간이 하나둘씩 뒤로 밀려나면서 뿌듯함과 아름다운 기억이 남는다. 첫 아이를 낳고, 힘든 기억은 잊고 미화된 추억만 안고 둘째를 또 낳는 것처럼.


땀을 식히고 비틀거리며 운동기구로 간다. 레그 컬, 익스텐션, 어덕션, 어브덕션을 첫날이니 10회 3세트씩 가볍게 해 본다. 지옥의 계단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이쯤이야 뭐. 이어서 카프레이즈 20회씩 3세트, 런지 15회씩 3세트, 스쿼트 30회씩 3세트를 중간중간 쉬어가며 한다. 여기까지 하니 1시간이 좀 넘게 걸렸다.


이렇게 첫 날 과제를 완수했다. 장경인대가 나아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뿌듯하다. 뭔가 큰 것을 성취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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