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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그림자 씨앗] 우장춘 박사 그리고 명성황후

“죄를 짓는 건 씨앗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어둠입니다.”

by JINOC

“죄를 짓는 건 씨앗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어둠입니다.”

조선 말의 격랑 속, 아버지의 그림자를 짊어진 한 과학자의 삶.

한국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 박사와, 그의 아버지 우범선의 충격적인 과거를 따라가 봅니다.


우장춘 박사는 누구인가요?

‘너희는 씨앗을 뿌리기만 하라.’
부산에 위치한 그의 묘비에 새겨진 이 문장은 그가 남긴 유산을 상징합니다.
우장춘 박사는 식물학자이자 육종학자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기를 거치며 한국 농업의 현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과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조선 왕실의 비극적인 역사와 얽힌 가족의 고통,
그로부터 비롯된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
그리고 이를 뛰어넘은 놀라운 업적이 함께 자리합니다.

wu.jpg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 출처 : 부산 MBC


아버지 우범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하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 말기의 무관으로, 일본과 협력하며 개화를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1895년 10월, 조선 왕비 민씨(명성황후)가 일본군과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합니다.

당시 우범선은 현장에 있던 조선 측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해의 실행자가 아니었더라도, 계획과 실행에 최소한 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로 평가받았고,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선 사회에서 ‘역적’으로 낙인찍혔습니다.

wu2.jpg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석 / 출처 : 나무위키




“죄인의 아들”로 태어난 우장춘

1898년, 우범선이 머물던 일본 시즈오카에서 아들 우장춘이 태어납니다.
그는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조선에서 철저히 지워진 이름이었습니다.
조국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학의 세계에서 묵묵히 길을 닦았습니다.
식물 유전학, 교배 연구, 종자 개량 등 그의 연구는
훗날 배추, 무, 양배추 등의 품종을 개선하며 한국 농업의 기틀을 세우는 토대가 됩니다.


광복 후, 고국 땅을 밟다

1945년 해방.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현실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한국 정부는 우장춘 박사를 과학자로 초청하며 조국 재건에 힘을 실어달라 요청했고, 그는 이를 수락해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세상은 여전히 냉담했습니다.
“저 사람, 국모를 죽인 자의 아들 아니냐”는 속삭임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종자를 개발하고, 한국 토양을 살리기 위한 일에 몰두했습니다.


‘씨앗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죄를 딛고, 오직 과학과 노동으로 조국에 헌신하며 ‘자신만의 구속’을 풀어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이런 말과 같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 살지 않았다. 다만 내가 사랑한 조국을 위해 살았을 뿐이다.”

이후 그는 부산의 땅에 묻혔고, 시간이 흘러 아버지 우범선도 한국 땅에 옮겨 함께 잠들게 됩니다.
그들은 역사라는 긴 그림자 속에서, 마침내 조용히 나란히 잠든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장춘 박사 가족사진과 우장춘 박사 / 출처 : 충대신문


기억해야 할 건 인물만이 아니다

우장춘 박사의 삶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 속 깊은 상처를 안고 태어났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묵묵히 땅을 일군 사람입니다.
‘우범선’이라는 이름은 죄의 상징이었지만, ‘우장춘’이라는 이름은 용서와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이름을 기억하며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씨앗은 죄를 지었는가?”
아니요. 죄는 시대가 짓고, 인간은 그것을 이겨내며 살아갑니다.
우장춘 박사는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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