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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 회사는 보고서만 남고, 실행은 사라지는가

동아시아 보고 문화의 병리와 서구 실용주의 조직의 결정적 차이

by JINOC

보고서가 조직을 움직이는가, 멈추게 하는가

“기획서를 잘 만들면 뭐 하냐, 어차피 아무도 실행은 안 해.”
많은 기획자들이 회의실 밖에서 이 말을 한다. 슬픈 건 이게 냉소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 기업문화에서는 문서가 일이 되고, 보고가 목적이 되는 구조가 일상처럼 반복된다. 보고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결정을 유보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벤처스퀘어 보고.jpg 보고 중 상사에게 혼나는 모습 출처 : 벤처스퀘어

한국의 조직은 왜 이렇게 보고서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우선 유교 문화의 잔재가 있다. 위계와 질서를 중시하는 조직은 상사의 판단을 우선시하고, 하급자의 기획은 '판단'이 아니라 '정서적 합의'를 위한 자료로 취급된다. 보고서는 상사가 안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하며, 때론 결정 자체를 미루기 위한 완충재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관료주의적 책임 회피 구조다. 한국형 조직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며, 누가 결정했는지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보고서는 ‘책임자의 결정을 보조하는 자료’가 아니라, ‘책임을 아래로 분산하는 기록물’이 된다. 보고서를 많이 만들수록, 책임이 모호해지는 구조다.

질책받는 회사원출처 : Freepic

서구 조직은 왜 실행 중심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

서구 특히 북미권 기업은 문서보다 책임과 실행을 조직 설계의 중심에 둔다. 예컨대 아마존은 보고서 대신 ‘6페이지짜리 내러티브 메모’로 회의를 진행한다. 중요한 건 디자인이나 분량이 아니라, 명확한 문제 정의・결정 사항・실행 계획이다.

또한, 그들은 **실행 담당자(Owner)**를 문서보다 앞에 놓는다. 보고서는 의사결정을 돕는 보조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무언가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회의는 문서를 검토하는 자리가 아니라, 실행을 결정하는 자리다.


보고 중심 문화가 만들어낸 조직의 병리

지금 한국 기업의 보고 문화는 다음과 같은 현상을 낳고 있다:

기획자들은 기획보다 문서 구조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보고서가 많을수록 실행은 지연되며 책임자는 사라진다

상사의 감정 맞춤형 보고가 전략을 덮어버린다

보고서는 쌓이지만, 실제 결과는 남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비효율 문제가 아니다. 조직의 의사결정 체계가 문서화된 면책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문서가 조직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스마트한 보고를 하는 이미지 출처 ; 벤처스퀘어

해결의 방향은 복잡하지 않다

보고서의 목적을 명확히 바꿔야 한다. 보고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자료이지, 책임 회피용 문서가 아니다. 모든 보고서는 “누가 이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 보고서를 토대로 무슨 실행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또한, 실행 중심의 기획 구조를 조직 차원에서 설계해야 한다. 기획서에는 책임자, 실행 일정, 리스크 시나리오, 측정 지표가 포함돼야 하며, 조직 평가 또한 보고서 품질이 아닌 실행률과 성과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고 절차보다 R&R 중심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실행 권한이 없는 사람에게 기획을 맡기고, 판단 권한이 없는 회의에 보고서를 올리는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결정과 실행은 보고의 끝이 아니라 출발이어야 한다.


이제, 보고는 줄이고 실행을 늘려야 한다

문서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문서가 조직의 판단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문서가 실행을 멈추게 만드는 순간, 그 조직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보고는 간결하고, 실행은 명확하며, 책임은 구조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보고서가 아니라 사람과 실행이 중심이 되는 조직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보고서 한 장으로 조직을 이끄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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